
<믿을 수 없는 충격, ‘로마의 몰락’을
마주하며> 신학도로서「신국론」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고백록」과 더불어 가장 잘 알려진 어거스틴의 ‘열렬한
대작’(magnum opus et arduum)이다. ‘신국론’(De Civitate Dei)은 원문대로 한다면 ‘神市論’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제목이 시 87: 3절에서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여기 ‘하나님의
성’, 즉 ‘the city of God’에서 영감을 받아 그 제목이 정해졌던 것이다. ‘신국론’은 플라톤이나
키케로의「공화국」(Republics)과 대비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붙인 성서적 제목이었다. 전 22권으로 이루어진 신국론은 어거스틴이
59세(413년)에 쓰기 시작해서 72세(426년)에 완성했다. 무려 13년이나 걸린 노작인 것이다.
주후
410년 8월 24일, 영원히 존속할 것만 같았던 로마 제국이 맥없이 무너졌다. 알래릭(Alaric)이 이끄는 고트족들이 불멸의 도시를 무참히
유린했다. 이교도들은 일제히 일어나 이 엄청난 재앙이 기독교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가 로마의 옛 신들을 추방했고 신사들을 폐쇄했기 때문에
로마가 망했다며 소리 높여 기독교를 규탄했다. 콘스탄틴 대제에서부터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찬란한 ‘기독교 시대’(Tempora
christiana)가 열리면서 로마를 수호해왔던 각종 신들이 기독교에 의해서 대대적인 침탈과 억압을 당했기 때문에 그 당연한 징벌로서 로마가
괴멸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교도들의 비난에 대응하기 위하여 쓴 역사 변증론이 신국론이다. 그래서 신국론의 완전한 제목도「이교도들을
반박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성에 관하여」(On the City of God against the Pagans)이다. 어거스틴은 신국론에서 좁게는
과연 기독교 때문에 로마가 몰락했는지에 대해서 응답하고, 넓게는 창조로부터 심판에 이르기까지 전 우주의 구원사를 탐색하고
있다.
<두 종류의 사랑으로 나뉘는 두 도성> 신국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10권에서 어거스틴은 각종 고문서 사료들을 대거 이용해서 이교도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 세상에서 행복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로마 제국의 팽창을 보증해주는 것으로서 믿었던 옛 로마신들의 허구성을 낱낱이 파헤친다. 어거스틴은 이른바 ‘시인들의 신학’(신비 신학)과 ‘로마
시의 공공 신학’(공중 신학), 그리고 ‘철학자들의 신학’(자연 신학)의 허점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어거스틴은 로마의 옛 신들이 단순히 ‘인간을
신격화한 것’(apotheosis)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기독교 고전이 모든 문학적, 예술적, 철학적 고전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11-22권에서 어거스틴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적극적으로 변호한다. 바로 이 후반부에서
어거스틴은 두 도성 이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성서의 도움을 받아 바벨론으로 비유되는 ‘땅의 도성’과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하늘의 도성’의
기원, 발전과정, 운명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땅의 도성은 사탄과 하나님께 반역했던 천사들로부터, 하늘의 도성은 하나님을 사랑했던
천사들로부터 각각 시작되었다. 두 도성의 전개과정을 서술함에 있어서 어거스틴은 인류 역사를 여섯 시기로 나눈다. 아담에서 노아까지→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다윗에서 바벨론 포로시기까지→바벨론 포로에서 예수 탄생까지→예수 탄생에서 최후심판까지.
중요한 것은 두 도성이 역사 경험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출생이나 가문, 거주지에 따라 자동으로 두
도성의 시민권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나 교회가 저절로 하나님의 도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이 기독교화 된다고 해서
저절로 하나님의 도성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늘의 도성이든 땅의 도성이든 간에 이 세상의 어떤 특정 사회나 제도와 동일시되어서 안 된다.
물론 어거스틴은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의미에서 로마를 ‘새 바벨론 제국’으로, 교회를 ‘새 예루살렘’으로 말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를
땅의 도성으로, 기독교를 하늘의 도성으로 본 것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오직 종말론적 교회, 즉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이루어지는
교회만이 하나님의 도성과 일치한다.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알곡이 쭉정이로부터 분리되듯이 하나님의 도성과 땅의 도성도 그 때 가서야 극명하게 분리
해체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두 도성은 대단히 모호하고 혼합된 상태에서 역사 속에서 갈등과 대립을
계속해나간다.
두 도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천사나 인간이나 공히 자유의지를 선용하느냐 악용하느냐에 따라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두 도성은 두 종류의 사랑에 의해 형성된다. 땅의 도성은 하나님을 경멸하며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의해, 하늘의 도성은
자기를 멸시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의해 각각 구성된다. 땅의 도성은 ‘Cupiditas', 자기 사랑에 의해 하늘의 도성은
‘Caritas', 하나님 사랑에 의해 각각 사로잡혀 있다.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랑이 두 종류의 인간상과 두 도성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두
종류의 사랑은 두 종류의 도성을 만든다. 즉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을 추구하는 사랑은 ‘지상의 도성’을 만들고, 자신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도성’을 만든다. 따라서 전자는 자기를 자랑하고 후자는 주님을 자랑한다”(De Civ. Dei, XIV, 28).
<‘교회 = 하나님의 도성’?> 이즈음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교회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교회 밖의 세상을 지상의 도성으로 동일시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관해서 어거스틴의 대답은 분명하다.
교회가 세상이 갖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와 성례전을 가지고 있기에 하늘의 도성에 가장 근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 그 자체와
하늘의 도성이 자동적으로 일치할 수는 없다고 본다. 보이는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저절로 하늘 도성의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만일 어떤 이가 세례와 성만찬을 명시적으로 거부하지 않을 경우 보이는 교회의 멤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늘 도성의 시민이 될
가능성도 있다. 내적인 기질과 덕성을 함양하고 사랑의 질서를 잘 잡아 최고선이신 하나님을 사랑해야지만 하늘 도성의 시민이 되는 것이지 단지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사회적인 사실만 가지고서는 하늘 도성의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교회를 비롯한 인간이 세운 그
어떤 기관도, 아무리 거룩하고 고결하다고 해도, 저절로 하늘 도성이 될 수는 없다. 하늘 도성은 말 그대로 하늘에 존재하는 영원한 원본이고
교회를 비롯한 지상의 모든 제도와 기관은 그 원본에 참여하는 모사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교회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있는 모호성과 혼합성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확신이었다.
사실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기독교 그 자체를 하나님의 도성과 일치시켜 온 기독교 제국주의 혹은 승리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 동방에서는 4세기 케사레아의
감독 유세비우스와 서방에서는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가 대표적인 사람일 것이다. 콘스탄틴 대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이의 기간 동안 기독교
제국이 눈부시게 발전했는데 바로 이 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비약적으로 구현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어거스틴은
초기에 이들의 견해에 동조했으나 후기에 갈수록 제도적인 기독교를 하늘의 도성과 일치시키는 것에 회의를 품는다. 하늘의 도성과 땅의 도성은 역사
안에 오직 모호하게 혼합되어있을 뿐이므로 제도적으로 명확한 선을 그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 그 자체가
저절로 하늘의 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교회는 항상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선한용 박사는 말한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미래의 영원한 도성을 가리키고 가르치는(증거하는) 상징적인 기능을 행사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 교회는 세상에 속한 인간의 기관과 같은
것이 되어 그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고 만다. 진정한 교회는 시간 안에서 영원한 도성을 가리키는 표지판(signpost)의 역할을 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이 표지판의 역할을 하지 않을 때나 못할 때는 종교개혁의 소리가 교회 내에서 터져나와야 하는 것이다."(「시간과 영원」, 159)
<제 3의 도성의 가능성은?> 이제 두 도성 이론과 관련해 흥미로운 질문 하나를
던지며 글을 마친다. 지상의 도성은 타락한 천사와 자기를 사랑하는 불신앙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반면에, 하늘의 도성은 선한 천사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뚜렷이 구분되는 두 개의 도성이다. 그런데 시간과 역사 안에서 정치 경제 사회를 이루며, 교회를 포함한
제도를 만들며 사는 사람들은 항상 모호하고 복합적이다. 어떨 때에는 땅의 도성에 또 어떨 때에는 하늘의 도성으로 왔다 갔다 하며 이중적으로
교차하며 산다. 그렇다면 하늘의 도성, 땅의 도성, 그리고 이 둘이 함께 모호하고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제 3의 도성을 가정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신플라톤주의자 어거스틴이 하늘의 도성이 초시간적인 천상의 원본 이데아인 까닭에 시간적이고 감각적인 지상에서 100% 완전무결하게 실현될 수
없다고 본다면, 결국 하늘의 도성은 시간 안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뿐인 이상적인 목적지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시간과 지상 안에서 ‘하늘의 도성’과 ‘땅의 도성’이 믹스된 ‘제 3의 혼합적인 도성’을 상정하는 것이 더 그럴듯하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대다수의 인류가 역사 경험적으로 속하는 도성이야말로 이 제 3의 도성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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