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세상에도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하나님은 어김없이 올 가을에도 아름다운 그림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있습니다. 콧속으로부터 폐부 깊숙이 상쾌한 공기가 들어오는 계절, 춥지도 덥지도 않은 살기 좋은 계절, 오곡이 익어가는 결실의 계, 살아온 인생을 반추해 보고 싶은 계절, 사랑과 추억을 간직한 지나간 과거를 사색하는 계절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 역경을 이겨낸 보람 있는 추억이 들어있는 가을 앨범 속에는 우리의 인생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이 좋은 계절에 살고 있는 우리는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열매가 익듯이 가을 속에 익어가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는 살아오면서 그 동안 섭섭했던 일, 오해 했던 일 있거들랑 모두 지워버리고 사랑으로 마음을 나누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며 살아갑시다.
가을 하늘이 얼마나 높고 맑고 청명한지 모르겠습니다. 기도하기에 좋은 계절,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우리에게는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 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 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 가지에 다달은 까마귀와 같이”
기도의 계절, 사랑의 계절,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해 우리에게 주신 최상의 선물인 가을을 비옥한 시간으로 채워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 세상에도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하나님은 어김없이 올 가을에도 아름다운 그림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있습니다. 콧속으로부터 폐부 깊숙이 상쾌한 공기가 들어오는 계절, 춥지도 덥지도 않은 살기 좋은 계절, 오곡이 익어가는 결실의 계, 살아온 인생을 반추해 보고 싶은 계절, 사랑과 추억을 간직한 지나간 과거를 사색하는 계절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 역경을 이겨낸 보람 있는 추억이 들어있는 가을 앨범 속에는 우리의 인생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이 좋은 계절에 살고 있는 우리는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열매가 익듯이 가을 속에 익어가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는 살아오면서 그 동안 섭섭했던 일, 오해 했던 일 있거들랑 모두 지워버리고 사랑으로 마음을 나누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며 살아갑시다. 마음과 마음이 모여 사는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마음은 아무리 퍼주어도 줄어들지 ? 駕윱求? 마음으로 모여 사는 마음 세상에도 가을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
여러분이 절망하게 될 때 무엇 때문에 절망하고 있는가를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절망에서 예외 될 사람은 없으며 절망의 영향권 안에서 벗어나 절망의 사각지대에 숨을 자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래도 절망하고 저래도 절망합니다. 가난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들도 절망합니다. 불치병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자들도 절망합니다. 결혼 못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도 절망합니다. 신용불량자라서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용 우량자들도 절망합니다. 가을이라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봄에도 절망했었습니다. 내 맘대로 안 되어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맘대로 잘 될 때도 절망했습니다. 인생의 모순 때문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풍요지수나 지식지수가 높아질수록 절망지수 또?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 앞에서는 영웅도, 위인도, 하나님의 사람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람은, 나보다 더 힘들고, 더 가난하고, 더 실패하고, 더 아픈 사람을 보며 용기를 얻습니다. 베드로를 보며 엉터리 같은 내 자신의 영성과 인격에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엘리야를 보며 우리와 같은 연약한 질그릇이었음에 한숨을 돌립니다. 만일에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 본래부터 훌륭하고 완전한 사람뿐이었다면 아마도 성경은 우리에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절망을 만나게 됩니다. 굳이 무엇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냥 사는 게 힘이 듭니다. 그냥 믿는 게 힘이 듭니다.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에 대한 중압감이 구름이 비되어 내리듯 우리의 심장을 압박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예외일 수 없으며 위인이라고 다르지 않으며 기도의 거인이라도 봐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절망은 삶의 모든 가능성과 미래에 대하여 희망의 여지가 없는 것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 어떤 사람의 변화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는 것 때문일 수 있습니다. 보통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으면 무조건 산 정상으로 올라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산위에 올라가면 길이 보인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어디가 정상인지 분별하기 힘들 때 극심한 절망에 도달하게 됩니다. 모든 문제의 정상에는 궁극적 해결자이신 하! 나님이 계십니다.
요즈음, 예수 믿다 절망하고, 기도하다 절망하고, 사람으로 인하여 절망하고, 교회로 인하여 절망하고 가난으로 인하여 절망한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절망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절망의 회복은 누구에게나 경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절망의 회복을 갈망하십시오.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 되게 하는 자원입니다. 절망 중에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급파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지금도 절망 중에 있는 교회, 가정, 성도들을 신속히 희망으로 회복시키시기를 소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렇게나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드렸던 모든 기도를 이 가을에 새롭게 고쳐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손을 대지 마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주여, 주의 손을 내게서 떼지 마옵소서. 계속해서 저를 만드시고 빚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 바랍니다. 여러 고통의 순간 "주여 침묵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 대신에 "주여 침묵의 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주님 깨닫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묶여 있는 모든 것을 보면서 "주여 풀어 주옵소서."라는 기도 대신에 "주여 오히려 더 묶어 주옵소서. 은혜의 줄로 사랑의 줄로 내 발을 묶어서 반석 위에 세우시고 사슴의 발같이 나를 만들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성숙한 기도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나무의 뿌리와 같은 것이고, 또한 새의 날개와 같은 것입니다. 깊은 기도를 통해 영혼의 뿌리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고, 그리고 영혼의 날개를 펼쳐 자유로이 창공을 날 수 있습니다. 또한 골프를 치려면 값비싼 골프채가 필요하지만, 기도에는 아무런 도구가 필요하지 않으며 테니스를 치려면 파트너가 필요하지만, 기도는 파트너 없이 혼자 할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어디서든 가뿐하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가을에 내게 물어볼 것은 무엇인가
가을을 선물로 받아 살아가는 우리가 인생의 가을을 맞으면 물어볼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가족에게 부끄러움이 없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반갑게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좋은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내 할 일을 다 하면서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지금 이웃에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좋은 사회인으로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주여,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올 가을에는 조건 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믿음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께로 향하는 기도하는 모든 이들이 가을 하늘이 파랗다는 것을 함께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눈과 마음과 귀를 열게 합니다. 부정적인 시각을 긍정의 시각으로 어두운 마음을 밝고 환한 마음으로 얕은 귀를 심혈의 귀로 열어 주며 한번쯤 더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고 삶의 한 부분으로 점차 꽉 채워져 갑니다. 작은 교회에서 일어난 작은 기도의 불꽃들이 큰 불덩이 이루어 이 땅의 황무함과 삭막함 속으로 번져 갔으면 좋겠습니다. 이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음에, 더 없이 행복한 가을의 길목입니다. 누구에게나 풍성한 가을되기를 구하면서.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에서 쓸쓸한 가을을 뜨거운 가슴의 영성 깊은 우리 영암의 성도들과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주여, 이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세상에는 "날"이라는 표현이 많습니다. 바쁜 날, 한가한 날, 생일 날, 죽은 날, 태어난 날, 약혼한 날, 결혼한 날, 좋은 날, 나쁜 날, 속된 말로 표현하면 재수 없는 날, 운이 좋은 날, 뭐 손이 없는 날, 등등, 날이란 개념이 너무 다양하고 많습니다. 성경에도 이 "날"이라는 표현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창조하신 날, 심판 날, 구원의 날, 은혜의 때, 추수의 때, 구속의 날, 재림의 날, 주의 날, 여호와의 큰 날 등, 많은 표현이 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날들 속에서 우리 인생들은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데, 어떻게 이 날들을 날마다 대하며, 살아가야, 실패가 없는 성공적인 인생의 삶을 누리게 되는가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처럼 많고 많은, 바닷가 모래알만큼이나 많고 많은 인생의 날들 중에, 가장 귀중하고 값지게 여겨야 할 날은 곧 다름 아닌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의 정하신 날" 입니다. 그러면 왜 이 날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그처럼 중요한 날입니까?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24절)
오늘 본문 24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계십니다. "이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로다." 한마디로 여호와께서 정해주신 이 날은, 우리 인생이 기뻐하며 즐거움을 얻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이 날이 소중하며 귀하다는 말입니다. 이 날은 보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시고, 악의 세력을 멸하시사, 죽음에서 승리하신 날, 즉 The Lord's day, 주의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승리의 날이요, 악의 세력에는 멸망?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이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구원과 형통을 기도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25절)
오늘 본문 25절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한마디로 주의 날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의 필요한 것을 구함으로 형통함을 얻게 되는 날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주의 날을 정해주신 것은 우리를 괴롭게 하시기 위함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날을 정해 주신 것은,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주의 전에서 기도하여 구원받고 형통하게 해 주시기 위해 주신 날입니다.
축복을 받는 날이기 때문입니다.(24절)
오늘 본문 26절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축복은 주의 집으로부터 임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이일이 너무나 좋아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신앙이란 자신이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하면 한낱 그림의 떡입니다. 다읫과 같이 주의 성전으로부터 임한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시고, 주의 전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 성전에 영원히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희생을 드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7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계십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묶지 않으면, 온전히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제물이 살아서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희생을 제단 뿔에 단단히 묶으십시다. 그럴 때 하늘로부터 축복의 응답이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주의 날은 바로 이것을 행하는 날입니다.
주께 감사드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27절)
이에 대해 오늘 본문 28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계십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50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소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나의 하나님, 내가㰡‘나의 하나님, 내가㰡로 연결되어 있는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신앙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이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㰡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㰡이는 믿음의 사람인 시편 기자가 하나님과 자기와의 내밀한 관계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피상적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번영, 미래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하나님은㰡그의
하나님(his God)㰡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my God)’
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객관적인 분이 아니라 주관적이신 분이시요,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㰡 나의㰡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어떤 성도의 간증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설교나 간증이 신앙을 갖거나 믿음을 성장케 하는 데 도움은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믿음 그 자체는 될 수가 없습니다.
신문에 실린 어떤 기독교 대학 교수의 글입니다.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며 그들로부터 많은 인사를 받는다. 그러나 거의 의례적인 인사이다. 허나 때로는 의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정한 감사가 담긴, 나를 가르쳐 주시는 나의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알고 진심으로 인사하는 학생도 있다. 그러면 교수도 그 학생 신상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고 기억 속에 입력을 시키며 깊은 마음을 주게 된다.㰡
추수감사예배는 매년 연례 행사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과거에도 은혜를 주셨고, 지금도 은혜를 주시며, 미래에도 은혜를 주실 나의 하나님께 깊이 감사 드리는 특별하고도 뜻깊은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 죄를 사해 주시고, 크고 작은 고난, 삶의 구석구석, 순간 순간에 은혜를 베풀어주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과 감사로 관계되어야만 합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의 봉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내 삶을 만들어 주신 내 하나님을, 내 주님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의 작은 축복에 감사함이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내가 감사하리이다
감사란 타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나의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다음주일에는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며 잃어버렸던 감사를 찾으시고 쏟았던 감사를 회복하십시오. 기독교인들의 최대 치욕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정신의 결핍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찾고 회복하여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만 있다면 내일에는 복되고 건강한 나, 가정, 교회, 그리고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분쟁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문제가 생김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겐 매사가 감사로 귀결되나 불평하는 자에겐 모든 일이 불만으로 끝납니다. 기독교인들의 생은 불만 속에서 피폐한 삶으로 종지부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는 은혜의 산물이요 신앙의 표현이며, 축복의 열매요, 천국 생활의 상징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내 속에 감사한 마음을 두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족도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감사란 기독교인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감사가 나타나는 곳에 참 신앙이 있습니다.
독일 재무장관을 지낸 마르티 바덴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말할 수없이 궁핍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지방 여행을 갔다가 싸구려 여관에 투숙,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의 신발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㰡어떤 죽일 놈이 내 신발을 훔쳐갔냐.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도둑질해가게 그냥 놔두시다니…㰡라고 하나님을 원망했답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이 창고에서 헌 구두를 꺼내주며 그에게 㰡오늘은 주일인데 나와 같이 교회에 가지 않겠느냐?㰡라고 했습니다. 그는 마지못해 여관 주인을 따라 교회에 갔습니다. 헌데 그의 옆자리에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앉아 눈물을 흘리며 찬송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더랍니다.㰡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두 다리를 잃었구나. 신발이 있다고 해도 신을 수 없구나.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복된가?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되는 것을….㰡
마르티 바덴의 삶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는 삶의 상황에 따라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명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와 국민에게 크게 봉사하였고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생활이 올바른 삶이며 축복 받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가 올바로 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다.㰡 어거스틴(Augustine)의 말입니다.
왜 없는 것만을 가지고 불평불만을 하십니까?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세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이기는 능력에 의하여 증명됩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대략 140억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헌데 기억을 관리하는 것은 대뇌의 후두부이며, 여기에 저장된 기억은 되새기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를 지나면 잊혀지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것으로 저장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저장된 기억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분리되며, 전자는 의지를 사용해서 노력해야만 기억되는 것이고, 후자는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절로 떠오르는 기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조건을 조사하고, 찾아내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생활 속에서, 그냥 나도 모르게, 당연히 저절로 내 속에서 살아나야만 합니다.
내가 높이리이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가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와 감격이 없이는 하나님을 높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높임에 있어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주저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높이는 만큼 높아지십니다.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내가 보잘 것 없는 낮은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아니시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요 자기를 감추는 것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를 낮추고 내가 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높이려 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내세우며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릴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이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절).㰡㰡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㰡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결정을 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실천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내 것이 될 것이요,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새로운 삶은 내 생활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의 하나님을 내가 높인다면 허락하신 모든 은혜와 축복이 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객관적인 분이 아니시라 주관적이신 분으로, 그의 하나님(his God)이 아닌 나의 하나님(my God)이십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의 봉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하나의 작은 축복에 감사함이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분쟁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문제가 생김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은혜의 선물이요 신앙의 표현이며, 축복의 열매요 천국 생활의 상징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감사란 기독교인임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감사가 나타나는 곳에 참 신앙이 있습니다. 감사란 삶의 상황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요,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내가 보잘 ! 것 없는 낮은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아니시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요 자기를 감추는 것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를 낮추고 내가 숨어야 합니다.
감사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原語)는 "토다" 입니다. 그 말의 본래 뜻은 "내 던진다"는 뜻입니다. 감사는 나의 모든 것을, 나의 전(全) 존재(存在)를,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것을 생각하라....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고 하셨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땅한 행동입니다. 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㰡그 행위를 옳게 하는 것㰡입니다.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감사를 통해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를 통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십시오. 잠잠히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십시! 오. 거기서부터 우리 그리스도인의 감사가 시작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감사보다 불평이 더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복을 세어보시기 바랍니다. 불평은 사라지고 찬양과 감사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알려진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 자매를 아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자매는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혼자서는 거동 뿐 아니라,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중증 뇌성마비 환자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비록 건강은 없어도, 가진 지식은 없어도, 공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많은 아름다운 시를 지었습니다. 그 중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감사절에만 감사하는 자여, 범사에 감사하라. 고난 주간에만 주의 고난을 기억하는 자여, 주 죽으심 언제나 기억하라. 위급할 때만 기도하는 자여,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쁠 때만 기뻐하는 자여, 항상 기뻐하라."
만약 이 고백이 정상적인 사람이 한 고백이라면 아마 많은 사람이 "너나 잘해, 너는 그렇게 하니?"라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증 뇌성마비 송명희 자매는 여러분에게, 아니 저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감사절에만 감사하는 자여, 범사에 감사하라."
'어쩌면 사랑이란 잃었던 시력을 찾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란 글이 있습니다. 발자크가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라고 말한 대로 우리에게 무엇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요, 그 무관심은 사랑이 없기 때문일진대, 사랑만이 우리의 감긴 눈을 뜨게 하는가 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그리고 자연에 대하여 좀더 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할 때 진정 내가 감사하고 높이는 일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