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 해가 가기 전에
본문 : 신 8:1-14
날짜 : 2004. 12. 19
설교 : 채규현 목사
할렐루야!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안에 공과대학이 있습니다. 보통 칼텍(Caltech)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한 실험을 했습니다. 냄비 두 군데에 개구리 한 마리를 각각 넣었습니다. 하나는 이미 끓인 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찬물부터 한, 두 시간에 1℃
정도를 서서히 높인 물인데 양쪽 개구리의 행동 양태를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뜨거운 물에 넣은 개구리는 금방 뛰쳐나갔습니다. 차가운 물에서부터
서서히 물을 데운 곳의 개구리는 찬물에 있다가 점점 온도가 올라가니까 마치 찜질방에 있듯이 편안하게 있다가 익어서 죽었습니다. 실제로 한
실험입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뜨거운, 갑자기 다른 변화가 있으면 금방 스스로가 눈치를 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도 이
서서히 데워지는 물 속의 개구리와 비슷해서 우리의 삶은 그렇게 급격한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서서히 변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변화에 쉽게 익숙해지고,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그렇게 있다가 점점 우리의 영혼이 죽어갈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속의
개구리가 뛰어 나올 힘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언제든지 뛰어나오려면 뛰어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뛰어나오려는
마음을 먹지 않고 그저 편하게 있다가 어느 순간을 넘어서는 더 이상 뛰어나올 힘조차 없이 그냥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생활을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점점 우리의 삶 속에 더 세상적인 것이 들어오고, 또 조금 더
세상적인 것이 들어오고…, 그렇게 조금 더 세상적인 것이 들어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까짓 것, 나는 믿는 사람인데, 언제든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다시 은혜생활 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열심히 신앙생활 할 수 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있어요.
자신있는 상태로 서서히, 서서히 세상에 물들어가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물들어가는지는 몰라요.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이제 자기 마음으로,
마음먹고 교회에 안 다니기 시작하고, 마음먹고 하나님을 안 믿게 되는 완전히 영혼이 죽는 그 시간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은 자기가 control(관리,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 속에서 ‘뭐, 지금 당장 성경을 안
봐도, 기도를 안 해도, 예배 참석에 조금 소홀해도 언제든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 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게 쉽게 금방, 가다가 훽 돌아설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팔이나 다리 부러진 경험
있습니까? 그 때 깁스를 하죠? 이제 뼈가 붙을 때까지 깁스를 하고 있다가 나중에 풀게 되면, 금방 팔이나 다리를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게 굳어 있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이것을 운동해 주어야 하고, 물리치료를 해야 됩니다. 한참동안 물리치료를 한 다음에야
비로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런 것처럼 여러분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한참동안 안
하던 일은, 어느 날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미 굳어져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주일에만 교회 오는 생활을 몇 개월 했다면 쉽게 생활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한 십년 동안 주일에만 교회 나오는 생활을 했다면, 그것은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박사과정 공부할 때에
같이 공부하던 미국 목사님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분이 자기 경험을 이야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미국 남부 지방 사람인데, 남부에는
습지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습지에 철새로서 오리들이 엄청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겨울에 그 오리사냥이 대단히 발달되어 있습니다. 이 목사님도
그래서 오리사냥을 나갔습니다. 습지에는 물이 많으니까 물 위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 쪼그리고 앉아서 이제 오리를 기다리는 겁니다. 호루라기
같은 게 있는데, 그 호루라기를 불면 “꽥꽥” 하고 오리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오리들이 자기 친구가 있는 줄 알고 오면 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는 저물어가고 오리는 안 오고해서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오리들이 내려와서 앉으려고 하길래 그 순간에 오리를
쏠려고 총을 겨누는데 추워서 몸이 굳어 안 움직이는 거예요. 오리들이 날아갈 때까지 몸이 잘 안 움직여져서, 결국 제대로 조준할 때에는 이미
오리들은 멀리 날아갔습니다. 자기 몸은 자기가 마음껏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만, 한참동안 그것을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 움직일 수 없는 사태가
오게 되어 있듯이, 여러분의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 그 생활을 매일매일 계속 여러분의 습관으로 되어
있지 않으면 ‘나는 그래도 언젠가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마음을 먹을 때에도 잘 안
됩니다. 여러분이 그래서 스스로 다시 돌이키기 힘든 그 순간까지 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주일에만 교회 나오는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문제가 생길 때, 여러분에게 큰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의 삶에 문제가 생길 때, 여러분의 가정에 문제가 생길
때, 여러분의 재정적인 문제가 생길 때, 여러분의 삶 속에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여러분을 덮치는 그 순간에 ‘어이쿠, 이 때 하나님께
구해야겠다.’ 하고 생각은 하지만 내 마음이 금방 하나님께 쏠리느냐, 그게 잘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경우에, 문제가 생기는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을 떠납니다. 교회를 떠나고, 더 이상 신앙생활을 안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그 기준대로 살려는 노력이 없으면, 지속적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능력으로 입히운 바 되지 아니하면 반드시
여러분의 삶에 문제가 생기고,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여러분에게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 말씀이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이제까지 너희 삶을 인도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물으십니다. 광야생활 동안에 만나로 먹이시고, 옷이
헤지지 아니하고(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이 아마 단벌이었나봅니다, 그런데 그 옷이 헤지지 않아서 얼마든지 그 옷을 입고 40년을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발도 닳지 않아서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에 입히시고, 먹이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너희들은 기억하느냐? 그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하는데, 내 말씀 안에 거하라. 계속해서 경건생활로 연습하는 그런 삶을 살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필경 나의 축복 속에 살 때에 나를 잊어버릴까 두렵도다.” 여러분 그렇죠? 내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처음에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합니다. 은혜가 있는 동안에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결국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하시죠.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은 영원히 그 어려움
속에 있게 하지 않으십니다. 결국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건져주시는데, 그 때 되면 “아, 하나님의 은혜구나.” 라고 느껴서 처음에는 좋죠,
감사하죠, 기쁘죠. 그런데 문제가 없는 시간이 계속해서 지나다보면 어느덧 하나님을 잊게 된다는 말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 순간에, 물질로 축복받은 순간에, 이 세상의 것으로 내게 풍요로운 그 순간에 자칫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하노라하고 하나님이
걱정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칫하면 모든 인간의 특징이기도 해요. 문제가 없으면 신앙생활이 나태해집니다. 오히려 죽음의 위험에
계속해서 처해있던 옛날 공산권의 성도들의 믿음이 더 신선하고 강력합니다. 아무런 제약이 없는 자유주의 사회에서의 신앙생활이 훨씬 더 나태하고,
능력이 없고, 쉽게 떨어집니다. 마치 오늘날의 청소년처럼, 덩치는 컸는데 체력은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크리스챤이 그렇습니다.
양적으로 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닙니다. 그러나 영적 체력이 떨어져 있습니다. 뭔가 움직여야 될 때,
달려야 될 때, 싸워야 될 때 능력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전체 인구의 1/4이 크리스챤이라는 바로 이때에 수없이 많은 크리스챤
리더들이 넘어지고 쓰러지고, 신문에 장식이 됩니다. 세상적으로 이런 잘못을 범한 사람도 크리스챤이고, 저런 잘못을 범한 사람도 크리스챤이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이제까지 되어 왔다는 말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여기 있는 그대로 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배부르고, 이
세상이 풍요로워서 하나님을 잊게 될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낮추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낮추십니다. 16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다 너희를
낮추시며 너희를 시험하사 마침내 너희에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처음에는 낮추심도 있고, 그리고 계속해서 “두렵건대, 두렵건대” 하고
나옵니다. 자, 14절을 봅시다.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또 17절에도 “두렵건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그렇게 될 때에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는 화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는 “정녕히 멸망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 속에 이 세상에서 풍요로워서, 문제가 없어서, 하나님을
잊고 그저 편안하게 이 세상을 산다면 여러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하나님의 경고가 있습니다. 이것이 꼭 마지막 날에
지옥에 간다는 그 의미 말고도, 이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자랑하는 바로 그것을 부셔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랑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없애실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재물이 될 수도 있고, 여러분의 건강이 될 수도 있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더 믿는 것, 그것을 없앤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시 여러분의 마음을 낮추셔서 하나님께로 돌이키시게 하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 문제가 있을 때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칠 때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물론 내 삶이 어렵다고, 내 삶에 환난이 닥친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 제가
잘못하고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지만 너무나 많은 경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그 경건한 삶에서 떠나갈 때, 시시때때로
반드시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환난이 있을 때에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과연 내가 하나님을 은혜를 잃어버렸는가?
과연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났는가?’ 이것을 체크해 보셔야 합니다. 이게 급선무예요. 여러분, 환난을 당할 때 먼저 이것을 체크해 봐야
합니다.
그러면 체크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제가 세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주 평이한 기준입니다. 스스로 한번 체크해
보십시오. 첫째, 내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축복하실 때에 이 세상의 것으로 먼저
주시지 않습니다. 먼저 이 세상의 것으로 받았다고 해서 기쁘고 감사할 때 자칫 잘못하면 그것은 가짜일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이 임할 때에는 먼저 은혜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은혜가 충만하게 하시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그 마음이 넘치게 될
때에 오히려 그 때 하나님이 부어주십니다. 그 때의 그 축복이 진짜 축복입니다. 언제나 그것이 비슷하게 가요.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복을
받고, 잊어버리고 두들겨 맞고. 그 청룡열차를 많은 믿는 백성들이 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환난이 임할 때 먼저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내 삶 속에 있는가? 내가 말씀을 읽고 있는가?’ 많은 분들, 특히 오랫동안 예수님 믿었던 분들이 그래요. “목사님,
내가 신앙생활을 몇 십 년을 했는데요, 성경을 거의 다 압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하는 것, 몇 십 년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 그게 문제가
아니고 “지난 일주일 동안 성경을 읽었냐고요? 지난 일주일 동안 여러분이 성경을 가까이 했냐고요?” 저는 그것을 묻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영의 양식이라고 했잖아요? 영의 양식이라 함은 무엇입니까? 오늘 아침에 식사들 하셨죠? 아니, 어제 식사를 하셨을 텐데 오늘 아침에는 왜 식사를
하셨어요? 양식이니까, 매일 먹어야 되니까, 어제 먹었어도 오늘 먹어야 되죠. 그런데 영의 양식인 성경은 “옛날에 많이 먹었어요.” 이게
통하냐는 말이예요. 옛날에 많이 먹은 게 지금 오늘 내 건강, 내 힘과 무슨 관계입니까? 영의 양식이라는 이야기는 매일매일 먹어야 되고, 끊이지
않고 먹어야 되고, 계속해서 먹어야 되고, 그리고 먹을 때에만 힘이 생겨서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안 먹으면, 힘이 없어서
하고 싶어도 싸우질 못해요. 능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은 내가 강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누누이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은 계속해서 영의 양식을 먹을 때에 그 영적 영양분을 통해서 내가 건강해지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일이 잘 되면 바쁘니까 성경을 잊어버려요. 성경을 잊게 되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뜻과는 반대로 하게 되고, 결국 잘못된 결정을 무수히
내리게 되고, 나중에는 엄청난 재앙과 환난을 만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심지어는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신학교에서도
이야기하고 제 자신에게도 이야기하는 것이, 성경을 자주 대한다 하더라도 제가 성경공부를 준비하기 위해서 성경을 본다거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것은, 물론 거기서도 은혜를 얻을 수도 있지만, 진정 내 양식이 되는 시간은 그런 목적 없이 그저 하나님을 만나려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할 때 진정 내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필요해요. 목사인 저도 그런데, 여러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선다는 기분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일주일이고 한달이고 말씀 안 읽고 그냥
늠름하게 걸어 다니는 것을 보면, 정말 하나님의 기적이 있기는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완전히 소말리아 사람처럼 말라 비틀어져서 아무런 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턱을 들고 다닙니다. 몇 십 년 믿은 게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오늘 밥 먹었느냐는 거죠. 어제부터 오늘까지 밥 먹고 힘이
나느냐 그게 문제지, 몇 십 년 밥 다 먹었어도 3일만 굶어보십시오, 어떻게 되는가. 또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씀 속에 모든 게
다 있다고 하는데, 우리의 삶의 기준을 다 여기서 잡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없는 말이 너무나 많으니까요.
예를 들어서, “주식을 사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 이런 이야기는 성경에 없단 말입니다. “제가 이 가게를 해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
성경에 없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담배 피지 말라는 이야기가 성경에 어디에 있습니까?” 합니다. 맞아요. 성경에 없습니다. 심지어는 술에
대해서도 성경에서는 2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그것까지 알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술은 붉고 먹으면 그 사람의 마음을 빼앗으니
보지도 말라는 말씀이 잠언에 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언제든지 성경안의 잔치에 보면 포도주가 빠지는 적이 없어요. 예수님이 가신 잔치에도
포도주가 나옵니다. 전혀 다른 두 가지 면에서 술이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런 말도 있고 저런 말도 있는데, 꼭 술을 먹지 말라는 게
말이 됩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기준을 성경에서 말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또 연말이 되는데 “고스톱을
치는 게 옳습니까, 안 옳습니까?” 그것은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안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아느냐는
말합니다.
과연 나의 행동이나 생각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인가 잘 모를 때 체크하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매일매일 성경 읽고,
매일매일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이게 성경적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것도 동시에 계속 하십시오. 계속 담배도 피시고, 계속 술도
마시시고, 술집도 가시고, 고스톱도 치고….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술 한 잔 들 때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 들어보세요. 담배 한 대
필 때마다 “주여, 감사합니다.” 하고 펴보라니까요. 실제로 해 보십시오. 두 가지를 계속 하다보면, 만약에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행동이
성경적이지 않다면-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반드시 갈등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거추장스러워서 둘 중의 하나는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두 가지를 같이 못해요. 양심에 찔려서 못합니다. 계속 찔리거든요. 성경을 보다보면 그게 여러분의 영혼을 살려서 여러분의 양심을 찌릅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하나님이 바로 옆에 계속 계시는 것 같아서, 야단맞을 것 같아서 못합니다. 그 기분이 들기 시작하거든요. 그러면 둘 중의 하나를
끊습니다. 은혜롭게도 많은 사람들은 하지 말아야 될 것을 안 하는 쪽으로 끊게 되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예 교회 다니는 것을 끊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어느 여자 분이 영혼에 갈증이 있어 은혜를 사모하다가 말씀 속에서 기쁨을 얻고 그랬는데, 그런 분명한
변화를 봤는데 어느 순간 교회를 안 나오는 거예요. 몇 주 동안 안 나오길래 심방을 갔더니 그 분의 하는 말이 “도저히 교회를 못
다니겠습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럽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 분이 미국 사람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혼자 사는 분이었는데 주말이
되면 술집에 가서 남자들을 만나고 같이 잠도 자고 그러는 겁니다. 그리고 주일에 교회에 오니까 마음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교회
오는 것을 그만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적이 아닌 것이라면, 계속 두 가지를 같이 하다보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태여 이건
맞고, 저건 아니라고 제가 나눌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나누기에는 저도 지혜가 부족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를 같이 해 보시란 말입니다. 같이 해
봐서 꺼림칙하면 안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꼭 술 먹고, 담배피고의 그런 문제만이 아닙니다. 밤 11시에 맛있게 라면 끓여놓고 “주여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 보십시오. 한밤중에 먹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이 퉁퉁 붓는데 뭘 감사합니까? 여러분의 몸을 건강하게 관리하는 것도
하나님 안에서의 책임이에요. 그런데 한밤중에 매일 라면 먹어가면서 기도해 보시라니까요. 하나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는 겁니다.
모든 행동지침이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은혜 안에서, 말씀 속에서, 기도 속에서 같이 하다보면 “아, 이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버릴 수 있는 힘도, 지속적으로 여러분이 성경 읽고 기도하는 행동만 버리지 않으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두 가지를 해도
계속 문제가 없으면 그때는 그것이 성경을 범하는 일이 아니거나, 아니면 여러분이 지독한 거짓말쟁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완벽하게 속일 때는
두 가지를 같이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의 판단은 본인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일들을 하면서 계속해서 성경을 읽고 있나? 그리고
내가 계속해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가? 마지막으로는 내가 예배에 계속 참석하고 있는가? 제가 거듭 이야기하지만, 여러분이 일주일에
한 번 주일 오전예배만 드린다면 여러분의 신앙을 까먹게 됩니다. 제 경험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만 교회에 다니니까 신앙이 내려가면 내려갔지,
올라가지 않아요.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도 안 됩니다. 마음이 메말라 있어요. 마치 미지근한 물에서 뛰어나오지 않는 개구리와 같은 심정입니다.
어느 순간을 넘어서고, 그리고 여러분에게 환경의 변화가 있고, 여러분을 폭풍우 몰아치는 속에 두는 어떤 일이 있으면 너무나 쉽게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만 교회에 나온다면
말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그만큼 연약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거듭 거듭 촉구합니다. 거듭 거듭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일주일에 한 번 교회 나오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안 됩니다. 일주일에 한 번만 나와서는 안 됩니다.
수요예배도 나와야 되고, 구역예배에도 참석해야 되고, 함께 믿는 백성끼리 계속해서 만나는 일들이 주중에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이 없으면 어느
순간에 여러분의 영혼을 누가 도둑질해갈지 모릅니다. 도둑질해가려고 할 때에 그것을 방어하고 저지할 능력이 이미 여러분에게 없습니다. 밥을
먹었어야 있죠. 영적 호흡을 해야 살아있죠. 정신이 혼미해져 있고, 누가 적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방어하고 저지합니까?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 하나님의 백성들과 모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여러분은 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신앙생활
하셨습니까? 스스로 영적인 결산을 한 번 해 보십시오. 항상 연말이 되면 다 결산하지 않습니까? 집안에서도 결산을 할 것이고, 우리 교회에서도
결산을 하고, 회사도 결산을 하고, 다 결산을 하고 금년 1년을 계산해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간의 매듭을 주신 것이 참 감사해요.
우리에게 시간의 매듭을 주셔서 시간의 흐름을 분명히 알게 하고, 시작과 끝이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이 춘하추동이 있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굉장한
축복입니다. 시간의 매듭이 있어서 시작과 끝을 거듭 거듭 느끼니까 더 인생을 생각하고 더 생산적으로 살 수 있는 계기가 그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열대 지방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춘하추동이 없으니까 시작과 끝, 시간의 매듭이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느리게 되고, 그저 시간을
허송세월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말입니다. 연말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금년 1년을 어떻게 사셨습니까? 결산을 한번 해 보십시오.
그리고는 만약에 여러분의 삶을 돌이켜 볼 때 거리낌이 있으면-내가 성경 보는 것도 제대로 못보고, 기도도 안하고, 예배참석에도 소홀했고, 이런
면에서 거리낌이 있으면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독려하고 계십니다. 그럴 때 “두렵건대 너희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너에게 문제가 있고 마침내 멸망의 길로 갈까 하노라.” 여기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부디 내년에는 금년보다 성경말씀에 가까이 하고, 기도를
더 열심히 하고, 예배와 모든 교회 모임에 참석하는 데에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진정 하나님의 축복을 맛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능히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 이 해가 가기 전에 (2)
본문 : 마 11:28-30
날짜 : 2004. 12. 26
설교 : 채규현
목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던지, 안 믿는 사람이던지 연말은 바쁘고, 약속도 많고, 피곤한 계절입니다. 여러분은 각각 여러
모임들에 참석하실 것입니다. 또 여러 가지 결산이나 마무리하느라고 바쁠지도 모릅니다. 그때에 금년 한 해를 돌이켜 보십시오. 어떤 한 해를
보내셨습니까? 항상 한 해를 지날 때마다 “다사다난했다” 라고 보통 이야기들 합니다. 1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 참 많이 있어요. 여러분의 각
가정마다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줄도 압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적으로 봐도 어느 해보다도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금년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큰
일이었다고 하면, 역시 담임목사가 바뀌는 일이 교회로서는 가장 큰 일이었겠죠. 제가 5월 5일에 이 ․ 취임식을 하고 금년이 지났는데, 전
목사님과 제가 다르기 때문에 교회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 때문에 홍역도 치르고, 또 여러 가지 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지나고 보니까
정말 세월이 오래 간 것 같습니다. 그러한 모든 일들을 지나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여러분의 지금 가는 길에서 과연
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대로 “피곤하고 지친 몸대로 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그 대상이 누구냐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입니다. 우리 삶의 여러 가지 일들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또
새로운 일들이 거듭거듭 물밀 듯 마치 파도치듯이 한 파도가 지나면 또 다른 파도가 오듯이 계속해서 오게 됩니다. ‘왜 내 인생은 한 가지 있이
끝나면, 좀 쉴 만하면 또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인생인지도 몰라요. 그게 다 끝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는 거겠죠. 어차피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힘든 일이 닥칩니다. 인생의 각각의 맡은 짐들이 다 있습니다. 그 짐 때문에
피곤하고 지치는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초청의 말씀으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혼자서 자기 일을 하느라고 애써 일하다가 피곤하고 지치고 힘든 사람들, 무엇인가 내가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그 뜻을
이루려고 열심히 노력하다가 중간 중간에 지쳐 쓰러지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도 내 힘으로 하려다가 피곤하다 힘든 일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1년
동안을 다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지난 1년을 돌이켜볼 때 ‘내가 뭐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열심히 산다고 했는데
별로 이룬 것이 없을 때도 있고, 이룬다고 한들 별것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때도 있고…. 이 때가 되면 ‘내가 또 헛되이 한 해를 보내고 나이만
한 살 더 먹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 초대에 빠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면, 그러한 면에서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면에서 지난 1년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고 ‘그래도 나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다, 그래도 나는 이 세상의 삶에서 만족하고 산다, 더 이상 내가 뭘 필요로 하랴.’ 이러면서 스스로의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아침에 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추운 겨울날 아침에 따뜻한 이불을 박차고 나오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분명히 더 좋은 것이 예배에 있기 때문에, 습관 속에서도 분명히 내가 이렇게 해야 되기 때문에, 이 속에 진정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렇게 나온 것 아닙니까? 그저 이 세상에서 쉼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오지 않겠죠. 더 좋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나오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야말로 여기에서 말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입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 이 세상의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주님 앞에 나와서 더 좋은 것을 구하는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그런 사람들에게-바로 여러분들에게 주님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는 말씀으로 약속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사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좀 더 내게 여유가 있고, 쉼이 있는
삶을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닙니까? 왜 조금 더 돈을 더 많이 벌기를 원합니까? 왜 조금 더 무언가를 하기를 원합니까? 왜 여러분이 부지런히
뜁니까? 결국은 그 열매를 여러분이 먹기 위한 것 아니예요? 그 열매란 안식과 편안함과 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내게로 와서 받으라”
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어느 노르웨이의 억만장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이 사람이 미국 남쪽의 서인도 제도에 있는 섬 하나를 샀습니다. 아주 따뜻한 곳의 섬 하나를 사서 거기에 온갖 자기가 원하는 모든
장난감을 다 집어넣었습니다. 아름다운 리조트도 짓고, 집도 짓고, 거기서 놀 수 있는 모든 시설들을 다 만들고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낙원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걸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돈이 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더 일해야 돼요. 더 일해야 되니까 자기가 만들어
놓은 그 곳에 갈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겁니다. 노르웨이에서 일을 하면서 따뜻한 남쪽이 그리워서 서인도 제도까지 왔는데, 그 길도 멀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육신적으로는 쉴지도 모르죠. 그러나 과연 그 사람의 마음속에 진정한 마음의 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마음의 쉼입니다. 29절 마지막을 보십시오.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육신적으로 편안함을 누리기 위해서 아무리 여러분이 온갖
장치를 해 놓아도 그 속에서 마음의 쉼이 없으면 과연 그 사람에게 쉼이 있을까요? 아무리 여러분이 멋진 집을 지어놓고 산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마음의 쉼이 없으면 그 집이 과연 편안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마음의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예수님 안에서 육신적으로는 더 바쁠지도 모르죠. 그러나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은 마음의 쉼입니다. 바로 이것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먼저 유념하고 기억하셔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쉼을 주리라” 한 그 약속의 방법-내가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그 쉼의 방법을 몇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보면 “다 내게로 오라” 고
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로 와야 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께 모였듯이 먼저 예수님께로 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께로 오는가?
마치 이것은 구약이 모형적으로 보여주는 면이 있습니다. 애굽을 떠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서 마침내 가나안 땅-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이것이 마치 모형과 같은 것입니다. 애굽은 세상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풍습과 삶의 방식을 떠나서
가나안 땅-곧 예수님을 모형적으로 보여주는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제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 풍습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진정 쉼을 얻고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삶입니다. 옛 풍습-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가졌던 모든 세상적 풍습은 버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일시적인 만족감과 쾌락을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주는 쉼 ․ 만족감과 예수님이 주는 쉼 ․ 만족감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이 주는 것은 언제나 여러분을 어떤
쾌락이나 만족의 상태로 띄웁니다. 플러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쾌락이나 만족감으로 띄우고 나면 그 뒤에 대책이 없습니다. 반드시
다시 제로(0)로 내려오는 일이 있습니다. 이게 아주 힘든 일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을 먹는 일이 있으면 만사 제치고 가서 첫 술잔
맛에 기분이 좋아 “아, 이 맛이다.” 하며 즐깁니다. 그러나 술을 먹다 보면 술이 술을 먹고, 술이 사람을 먹는 일이 벌어집니다. 완전히
곤드레 만드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벽에 변기 부여안고 속이 아파 울어야 됩니다. 세상의 쾌락은 올라감이 있으면 반드시 내려옴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계속해서 끊지 않고 한다면 결국 그 사람의 간은 녹고, 위장도 구멍이 나서 완전히 몸을 망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담배도 마찬가지고, 심지어는 몸에 해롭다고 하는 것 말고라도 세상적으로 이야기하는 모든 쾌락들 ․ 즐거움들은 다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여행을 떠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떠날 때는 가슴이 설레서 떠납니다. 계획도 많죠. 놀 때는 좋을지 몰라요. 모든 차도 없고 공해도
없는 곳에서 자연을 만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차도 많고 공해가 찌든 곳에 다시 돌아와야 된다니까요. 그 길을 결국 다시 와야 해서 원점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 세상의 행복과 쾌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쉼은 전혀 다릅니다. 한번 올렸다 떨어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쉼은 보다 영원한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시 그것을 다 반납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쉼은 진정한
것이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전에 미국의 저희 교회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간증한 적이 있는데, 이 사람이 전에
코카인(cocaine)이라는 마약을 자주 했답니다. 코카인을 하면 정신도 맑아지고, 세상에서 못 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고, 누구든지 내가
이길 것 같고 그런 마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분이 참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약효가 떨어질 때 다시 완전히 시궁창에 처박히는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그 뒤가 정말 감당이 안 되게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 믿는 것을 비교합니다. 예수님 믿고 보니까 예수님
믿으면서 기쁨의 찬송을 하고 하는 것이 마치 코카인을 할 때와 상당히 비슷하대요. 그런데 차이점이 뭐냐면, 코카인을 하면 반드시 떨어지는 순간이
있는데 예수님 믿고 기쁜 것은 그렇지 않다는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이 주시는 행복에는 마이너스(-)가 없습니다. 더하기(+)만 있습니다.
세상의 것은 항상 누리면 그만큼을 반드시 빼야 합니다. 비록 술, 담배가 아니어도 세상의 모든 즐거움은 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로 와서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여러분이 안식을 누리려 하고, 쉼을 얻기를 원하고, 평안을 얻기를 원하고, 기쁨을 얻기를 원할 때 여러분이 얻는 것이 진짜이고
영원한 것인 줄 믿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방법은 “내게 와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거듭 거듭 “나” 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전부 “나”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비해서
우리 인간들이 “나”를 많이 하면, 보기에 추해보입니다. 제가 여기서 설교하면서도 “내가, 내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고개를 돌려버릴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채 목사가, 채 목사가….” 이런다면 여러분은 또 고개를 돌릴 것입니다. 자꾸 내가 드러나니까, 인간이 드러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계속해서 “나, 나”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될 때만이 비로소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이 있고, 진정한 평안이 있고, 진정한 쉼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스스로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와 관계를 갖자” 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설교를 해도 제가 이야기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 이야기 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예수님이 뜻하는 바를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 예수님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소개하고 밝히 보여드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여러분과 예수님의 관계가 진정 맺어질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이 세상의 백성들에게 쉼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쉼을 얻는 방법이 무엇이냐면, 바로 예수님과 관계를 갖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계속 예수님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 관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계속 “나, 나”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쉼의 방법을 이야기하기를 “멍에를 메라” 고 하십니다. 그런데
쉼과 멍에는 전혀 반대말 아닙니까? 멍에는 항상 지치고 피곤함의 상징입니다.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소에게 있는 멍에
아닙니까? 그런데 오히려 그 멍에를 씌움으로 쉼을 주겠다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말
아닙니까? “내 멍에를 메라 그러면 쉬게 하겠다, 이 짐을 더 지라 그러면 쉬게 하겠다.” 나는 지금도 세상의 짐이 무거운데 어떻게 예수님의
짐을 또 집니까? 제대로 여러분의 예수님의 멍에를 메면 세상 짐은 내려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 면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여러분이 경험해 봐야 됩니다. 사실 피곤한 일꾼들에게, 무거운 짐 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편안한 침대요, 휴가요, 뜨거운 찜질방일 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고 멍에를 약속하고 계십니다. “내 멍에를 지고 내게 배워야만 비로소 쉼이 있다.” 고
이야기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사실 기도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다른 말로 돌려서 이야기하면-여기 있는 면대로
표현해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 저 좀 쉬게 해 주십시오, 고통에서 벗어나서 우리 온 식구 건강하고, 아무 문제없고,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십시오.” 결국 쉼에 관한 이야기이거든요. 주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은 쉼입니다. “내 병에서도 자유롭기를 원하고, 물질적으로도
고통받지 않게 해 주시고, 평안하게 해 주십시오.” 바로 이런 기도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쉼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간구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정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멍에는 일의 상징이니까요. 그리고 멍에를 멘 존재는(소도 마찬가지고) 소를 모는 사람들과 그 길을 보조를 맞춰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멍에게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보조를 맞춰서 가야 되고,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일을 하는 것이 멍에입니다. 그래야
쉼을 얻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멍에를 온전히 잘 지고, 거기서 예수님께 배우고, 그래서 쉼을 얻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 중에 중요한 목적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 모든 이 세상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다 불러 모아서 안식을
주려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교회 나오면 먼저 평안함과 쉼에 대한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원해서 교회에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쉼은 원하지만 그 방법으로의 멍에는 원치 않습니다. 멍에 안 메고 쉬기를 원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방법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적이 없고, 오직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울 때에만 쉼이 있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런
면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예수님과 똑같이 여러분에게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 서 있고, 제가 담임목사로서 이 교회를
이끌고 가는 가장 큰 목적은 수많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다 불러 모아서 예수님이 주시는 안식을 선물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안식을 여기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함께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멍에도 주기 원합니다. 그것을 잘
받으시겠습니까? 멍에도 주기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멍에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도 큰 교회인데, 큰 교회의 약점은 여기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각각 다 멍에를 주기에는 상당히 조직적이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직화시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합니다. 요즘에 많은
사람들이 큰 교회로 가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냐면, 숨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일에만 예배드리고 가도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 안 나왔냐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거든요. 제가 이야기들어보니까 우리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도 한참을 교회 다니고 있는데
아직도 등록을 안 한 사람들도 있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귀찮으니까 그럽니다. 괜히 등록하면 전도사님이 심방 온다고 하죠, 뭐 하라고 하죠,
안 가면 또 왜 안 왔냐고 전화하죠, 이런 게 다 귀찮거든요. 그냥 자유롭게, 예수님 믿으니까 교회는 다녀야 되겠고, 교회 와서 살짝 하나님께
얼굴만 보이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일주일이 편할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들에게 제가 자신있게 말합니다. 쉼이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쉼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아직도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쉼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믿은 지 얼마 안 되서부터 교회에서 일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차피 열 몇
명밖에 안되는 교회였으니까요. 제 아내도 믿은 지 얼마 안 되서 반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해서 교회에서 끊임없이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0년 전에 한국에 신학교 교수로 오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교회에서 생활을 하다가 이제 신학교 교수가 되니까, 목회는 하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는데 처음에는 성도님들 자리에 앉아있으니까 괜히 불안해요. ‘내가 왜 여기 있지? 난 저 강대상에 있어야 되는데 왜 여기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몇 달 동안은 편안해서 너무 너무 좋았습니다. 주일에 오전 예배드리고 나서 집에 가서
점심을 먹는 거예요. 생전 집에 가서 점심을 먹어본 적이 없는데 이제 그 때부터는 집에 가서 점심을 먹는 일이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점심
먹고 편안하게 소파에 있으면서, 정말 세상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야, 교수 생활하기 잘 했다.’ 이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6개월, 1년 되니까 못 살겠어요. 일중독 때문에 못 살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삶의 보람이 없어요. 교회 생활을 안 하니까 영 몸이
뒤틀려서 안 되겠어요. 그리고 은혜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마음의 갈등이 생기는데, 신학생들 앞에 서서 교회는 어떻게 하라,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라 이야기하면서도 내 마음에서는 점점 은혜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역을 안 하니까요. 그래서 한 1년여 지난 다음에 제가
다니던 그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저한테 일을 주시던지, 아니면 다른데 가서 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저에게 일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비로소 내 교회도 되고,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언제나 매일
매일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까 새벽예배 안 가도 되는 겁니다. 처음엔 편안해요. 그런데 새벽예배를 안 드리다 보니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밤에 잠자는 시간이 늦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새벽 2시, 3시까지 있다보면 아침에 억지로 일어나서 학교 가는 겁니다. 간신히
일어나서 말입니다. 그러니 생활이 이제 엉망이 됩니다.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교회 일을 하기도 하고, 마침내는
학교의 허락을 받아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제 경험으로 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절대 축복이 아니예요. 처음에는 편안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절대로 축복이 아닙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여러 가지 목표가 있겠지만, 그 목표 중에 제일 큰 목표가 뭐냐면 온 성도들을 절대로
놀리지 않는 겁니다. 누구든지 그냥 주일 예배만 똑딱 드리고 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진짜 은혜를 아니까,
그래야 진짜 쉼을 얻으니까요.
금년 1년을 돌이켜 보십시다. 여러분, 어떻게 신앙생활 하셨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에게 받은
은혜가 있으니까 열심히 일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하나님 말씀 중에 어떤 약속이 있냐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런데 어떻게 쉬느냐면 “내 멍에를 메라.”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열심히 갈고 닦으면서 멍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성경공부도 더 많아져야겠고, 제자훈련도 해야 되겠고, 또 새가족 성경공부, 중보기도팀 등 여러 가지 배움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여러분이 헌신할 수 있는 길들이 교회에 많이 있습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헌신, 그 헌신이 확실하게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길입니다. 남에게 보여지는 헌신은 세상적 기쁨을 누릴 수 있다니까요. 그런데 보이지 않는 헌신을 할 때에는 확실하게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한번 그 차이를 비교해 보십시오. 대표적인 예로 주일학교 선생님들, 우리는 애들을 맡겨놓고 몰라라 할 수
있어요. 안 보일 수 있습니다. 또 차량부에서 교통정리 하는 일, 많은 분들이 어제 와서 같이 성탄 예배드리고 맛있게 점심을 드시고 가셨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돼지고기 삶고, 반찬 만들고 하면서 며칠 전부터 우리 식당에
쉼이 없었습니다. 어제 여러분이 다 먹고 가셨죠? 이 교통정리하는 차량부 분들은 여러분이 다 먹고 가신 후에 떨면서 들어왔더라고요. 제가 그
분들에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누리고 가는 겁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다 갈 때까지 끝까지 교통정리하고 오시는
것입니다. 이 분들의 헌신이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헌신하는 그 분들에게 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이 있을 줄 믿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여러분에게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게 청소하는 분들도 우리 교회에 많이 있습니다. 앞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호스피스나, 장애인 사역이나, 불우이웃 돕는 데에도 여러분이 많이 참석하실 것입니다. 또 소록도에 계속 다니면서 이 ․ 미용 봉사하시는
분들도 있고, 선교팀으로 가서 봉사하시는 분들도 있고, 여러 부서마다 있습니다. 혼신을 다해서 일을 하는데, 일을 해 본 사람은 압니다.
하다보면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안 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마치 처음에 안 하던 것을 할 때 습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소록도에 가서 나병 걸린 사람들을 만져가면서 봉사하려고 할 때 얼마나 힘들겠어요? 호스피스 사역하면서 이미 생명이 꺼져가고
냄새나는 사람들에게 목욕을 시키고 그 사람들을 위로하고 같이 있을 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단 시작을 하면 못 놓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다보면 참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내 인생의 짐이 벗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내
인생의 짐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과 쉼입니다. 저는 이 쉼을 여기 있는 모든 분들에게
선물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여러분이 택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결단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동참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하고자
동참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안식이며 쉼입니다. 내년 1년을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이번 주에 아직 우리
교회에서 제직 임명 받지 않은 여러분들에게 서약서가 나갈 것입니다. 서약서에는 4가지 항목에 구체적으로 여러분이 각각 하겠다는 싸인을 해야
합니다. 첫째, 주일을 성수하겠습니다. 두 번째, 십일조를 하겠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십일조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세
번째, 술 담배를 하지 않겠습니다. 네 번째, 교회에서 주시는 일을 하겠습니다. 이 네 가지는 각각 싸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중에서 한 가지라도 빠지면 본인이 직분을 원치 않는 걸로 간주합니다. 금년에는 새로 임명받는 분들에게만 서약서를 나눠 드렸지만, 내년 말부터는
모든 집사님들에게 서약을 다 하게 할 겁니다. 이 헌신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새해에 여러분이 결단하십시오. 분명히 제가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 주시는 멍에를 각각 메고 그 일을 여러분이 감당하기만하면,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과 쉼이 있습니다. 제가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면에서 다시 한 번 금년 한해를 정리하면서 “내가 얼마만큼 하나님께 헌신했던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내가 얼마만큼
주님의 은혜 안에 안식과 평안과 소망 있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함께 보십시오. 그리고 내년을 위해서 결단하십시오. 분명 예수님의 멍에는
멍에입니다. 일입니다. 나름대로 힘듦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인간관계의 문제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멍에니까요. 그러나 그 멍에가 세상 짐에는
비교할 바 없이 가벼운 것이라 이겁니다. 처음에 습관이 들기 전에는 그 멍에가 더 무거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습관이 들면 세상 짐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벼운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새벽예배도 드리라고 권하고 싶어요. 새벽예배는 우리 교회의 영적 발전소입니다. 한번 결단을 해
보십시오. 새벽예배가 제일 힘든 사람이 누구냐면, 일주일에 두세 번 나오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습관이 안 되기 때문에 가끔 한번씩 나오려면
정말 힘들어요. 아예 한 일주일 꼬박꼬박 새벽예배 나오려고 작정하고 나와 보십시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쉽습니다. 훨씬 쉽습니다. 다른 모든
헌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멍에를 메고 나서 드디어 예수님이 주시는 쉼과 안식을 누리며 기쁨으로 승리하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