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8)-구원의 투구를
쓰라 구원의 투구를 ……가지라.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무장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맨 마지막에 나오는 성령의 검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공격용 무기가 아니라 방어용 무기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늘 말씀 드릴려고 하는 구원의 투구 역시 방어용 무기입니다. 영적 무장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방어적이고, 수동적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도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39-44).”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17-21).”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다분히 방어적이고, 수동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삶의 방식이 최선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 더 좋은 삶의 방식이 없습니다. 악을 이기는 최선의 방법이 사랑 외에 또 있는가? 없습니다. 악은 더 큰 힘으로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무장의 본질(本質)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리, 의, 복음, 믿음, 구원, 말씀, 이런 것들이 허약하게 보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탄의 공격을 무력(無力)하게 만들 수 있는 최선의 무장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복음의 신발을 신고, 구원의 방패를 들고, 성령의 검을 들었을 때, 우리를 위해서 싸워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들려 주시는 무기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사무엘상 17:47).”고 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선언하고 골리앗과 싸움을 벌였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골리앗은 난공불락의 거인이었습니다. 키가 6규빗(cubits)하고 한 뼘이라고 했거든요? 한 규빗이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니까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략 41-52 쯤 됩니다. 그렇다면 골리앗의 키는 3m가 넘습니다. 이런 거인이 머리에 놋투구를 쓰고, 온 몸에 갑옷을 입었습니다. 갑옷의 무게가 5,000세겔이라고 했는데 약 60kg 쯤 됩니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었던 창의 창 날 무게만 7kg이었습니다. 골리앗의 앞에는 호위병이 방패를 들고 섰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에 맞서 싸우는 다윗은 초라해 보입니다. 사울 왕이 입혀 주는 갑옷을 벗어 버렸습니다. 손에는 칼 대신 양을 치던 때 쓰던 지팡이(staff)와 물매(sling)를 들었습니다. 그의 주머니 속에는 시냇가에서 주은 조약돌 5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골리앗이 이런 다윗을 보고 가소로와서 웃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전쟁은 하나님께서 속한 것이라고 일갈(一喝)했던 다윗의 조약돌은 어느 무기보다도 정확하고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골리앗은 힘을 한번 써 볼 틈도 없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물매에 넣어 던졌던 조약돌의 위력이 대단했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과 함께 싸워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골리앗을 이긴 것입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한동안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메이드 인 유에스 에이(Made in U. S. A)라고 하면 사족을 못쓰는 때가 있었습니다. 소위 미제(美製) 물건이지요. 우리가 만든 국산품 (國産品)하고는 워낙 품질이 차이가 났던 때 일입니다. 그 때는 미제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다 튼튼하고 좋은 물건으로 알았습니다. 또 일제(日製) 물건을 좋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Made in Japan이지요. 소니(Sony)나 내쇼날(National) 제품이라고 하면 무조건 좋아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손재봉틀이 있는데 일본 주키(Juki)에서 만든 것입니다. 제 기억으로 1960 이전에 아버님이 사 주신 것이니까 적어도 43년은 넘은 것입니다. 지금도 멀쩡하게 쓰고 계십니다. 그리고 밥솥도 그래요.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주부들이 일제 코끼리 밥솥이라고 하면 깜빡 죽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밥솥 파동이 났겠습니까? 지금은 Made in Korea 밥솥들이 더 좋다고 합니다. Made in U. S. A. 제품을 좋아하고, Made in Japan 제품을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 아닙니다. 그 제품을 만든 미국이나 일본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똑 같은 방법으로,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입니다. Made in Kingdom of God, 하나님의 나라 제품들입니다. 제품의 질과 성능은 하나님께서 보장(保障)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성도는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했습니다. 투구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머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머리는 우리 몸 중에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머리를 다치면 그것이 치명적인 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이 헬멧을 씁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도 머리에 헬멧을 씁니다. 야구 선수들, 풋볼 선수들도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헬멧을 씁니다. 그렇다면 영적 싸움에 있어서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성경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그냥 “머리에 투구를 쓰라”고 하지 않고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했습니다. 물리적인 전쟁이라면 튼튼하게 만든 철모를 쓰면 됩니다. 그러나 영적 싸움에서는 “구원의 투구(the helmet of salvation)”를 써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개념 중에 바로 잡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구원을 과거(過去)의 사실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말에 “구원 받았다”는 말이 주는 뉘앙스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말 속에는 과거의 죄를 용서 받았다는 뜻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죄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앞으로도 죄를 이겨나갈 힘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를 너무 좁은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구원을 “야사(yasa)”라고 합니다. “야사”는 위험이나 고통(distress), 적(enemies), 속박(bondage)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그리이스어로 구원은 “쏘테이리아(σωτηρία)”입니다. “쏘테이리아” 역시 위험으로부터 보존되고,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이 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죄로부터 구원 받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셋째로, 구원이라는 말 속에는 회복(回復)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래의 완전한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말 속에 “온전(wholeness)” “건전(soundness)” “건강(health)” “치유(healing)” 등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선물을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죄로부터 용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죄의 모든 유혹과 공격을 이겨낼 힘을 받았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하나님의 관심과 보호 속에 있습니다. 위험이나 죽음이나 고통이나 우리의 삶을 구속하는 것들이 단순히 우리 혼자 겪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셨을 때는 이런 문제들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바울의 승리의 선언(宣言)을 기억하십니까?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1-35, 37).”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친히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건강하게 하십니다. 회복시키시고, 치유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바울처럼 고난 중에서도 승리의 선언을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인생의 패배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승리자로 삽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무장으로 “구원의 투구를 쓰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확신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사탄의 공격은 교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교묘하게 우리의 생각을 파고 들어와서 구원의 확신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죄의식을 불어 넣습니다. 그것도 아주 논리적인 방법으로 흔들어 놓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리스도인들 중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찾아 보기 어려운 것은 왜 그렇습니까? “목사님, 전에는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요. 여러분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맞아! 너의 과거의 죄는 용서 받았다고 치자. 그런데 지금 네가 얼마나 죄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네 자신이 잘 알 것이다. 이 죄도 용서을 받았단 말이냐? 어림도 없다.” 사탄은 늘 이렇게 그럴듯한 논리로 성도들의 머리를 공격합니다. 구원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릇된 생각을 불어 넣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진리의 허리띠가 무슨 소용이 있고, 의의 흉배가 무슨 소용이 있고, 믿음의 방패가 무슨 소용이 있고, 성령의 검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이 들 때 어떻게 이런 생각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구원의 투구를 쓰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구원은 과거의 죄만 용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윌리암 버클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구원이란 과거를 돌아보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구원은 단순히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모든 미래의 죄의 공격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은 우리에게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와 미래의 죄를 이길 능력을 준다(We must always remember that salvation is not something which looks back only. Salvation is not something which means only forgiveness for past sins; it means strength to deal with all future attacks of sin. The salvation which is in Christ gives us forgiveness for the sins of the past, and strength to conquer sin in the days to come.).” 휴전선에 가면 양측이 모두 대형 스피커 시설을 해 놓고 선전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쪽에서는 대북 방송을 하고, 저 쪽에서는 대남 방송을 합니다. 대남 방송을 들어 보면 말도 안되는 것들입니다. 어떤 때는 정부를 비방하는 방송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아주 처량한 노래도 틀어 준다고 합니다. 이 방송을 듣는 우리 측 병사들이 평소에는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하면서도 북으로 넘어가는 병사들이 있다고 합니다. 큰 사고를 쳤다든지, 상관에게 야단을 맞았다든지, 애인이 변심(變心)했다든지, 집안에 우환(憂患)이 있다든지 할 때는 평소에는 거짓말처럼 들리던 대남방송이 그 때는 솔깃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사탄이 성도들을 유혹하는 방법이 꼭 그렇습니다. 아주 교묘하게 우리 머리를 파고 듭니다. 이럴 때 구원의 투구를 쓰고 무장하지 않는 성도는 넘어가기 십상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쓴 시편 59편 말씀을 아십니까? 이 시편은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쓴 시편입니다.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犯過)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3절).” 사람이 이런 때에 제일 약해집니다. 자포자기(自暴自棄)하기 쉽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오해를 받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다윗은 떳떳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은 한 나라의 왕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를 죽이려고 자기 집 앞을 지키고 포위했습니다. 이제 다윗의 인생은 끝이 났습니다. 여러분, 이런 때 자기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렇게 믿어봐야 돌아오는 결과가 뭐야?” 이런 생각이 들 때 참 이기기 어렵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그 위기의 때를 이기는지 보십시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患難)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16-17절).” 다윗은 구원의 투구를 썼습니다. 그의 머리에 치명상을 입히기 위하여 집요하게 공격하는 사탄의 공격을 다윗은 구원의 투구를 씀으로써 막아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다윗은 사탄의 밥이 되어서 3류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울과 치고 받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탄이 그의 머리를 공격했을 때에 구원의 투구를 썼습니다. “나는 결코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심하지 않겠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피난처이시며 나의 산성(山城)이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구원의 선물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편 62:2, 6).”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즘 에스겔 말씀을 읽다가 보니까 유독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런 구절이 104번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라는 구절이 15번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두고 맹세한 말이니까 틀림없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신 분은 “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구원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탄이 여러분의 머리를 공격해 올 때 지체하지 말고 구원의 투구를 쓰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