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의 회복
                     막16:15-18,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뿌리를 내려서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ich)는 이것을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뿌리, 우리의 근원이 누구인가를 찾아 그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능력을 얻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3절에서 ꡒ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ꡓ고 하였습니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마가복음 9장 23절에서는 ꡒ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ꡓ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머슨은 ꡒ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이 세계를 향하여 어떤 에너지를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그들에 의해서 세계가 지배된다.ꡓ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1809~1865)은 ꡒ인생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힘에 의해서 움직여진다.ꡓ라고 말했습니다.


ꡒ능력ꡓ이란 단어는 신약교회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은 역동적이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이런 삶의 모습이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역동적인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면 우리의 신앙이 능력이 있고, 우리의 교회가 역동적인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삶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오늘 저는 성경에 나오는 여러 기적들을 말씀드리면서 이 같은 기적들이 이루어지게 된 그 역사적 배경에 깔려진 어느 한 공통점이 있는데 이 공통점이 바로 능력을 덧입는 축복의 통로라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이 능력의 비밀을 깨달아 하나님의 살아 계시고 온전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능히 정복하고 다스리고 충만케 하므로 매사에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살아가는 늘찬양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마노아의 잉태 기적


     지난 주 수요일 저녁에 구약의 마지막 여성인물로 ‘마노아의 아내’를 소개하였는데 그녀는 영적 타락의 시기인 사사시대의 인물로 시대적인 흐름이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좇아 마음대로 행하며 살던 시대'에 참 믿음과 신실함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던 신앙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를 닫아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그리고 그 아들이 자라서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구원하는 인물이 되리라ꡓ(삿13:3,5)고 약속의 말씀을 전할 때에 마노아의 아내는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을 뿐 아니라 남편 마노아에게 이 사실을 전달할 때에 마노아의 남편 역시 “당신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더니 이제 완전히 정신이 돌았나보군 아이가 없어도 괜찮으니 그런 헛소리 그만하고 조용히 해” 한 것이 아니라 아내와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아내가 한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아내가 받은 약속의 말씀에 대해 어떠한 의심의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반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남편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네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는 약속의 말씀을 하셨다 하자 사라는 창세기 18장 13절에 있듯이 “사라가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하면서 믿지를 아니했습니다.


태가 닫혔던 두 여인이 하나님으로 똑같은 자녀 잉태의 약속을 받았는데 왜 사라는 믿지 못하였고 마노아의 아내는 믿었을까요? 이 두 사람의 믿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라는 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다보니 믿어지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마노아의 아내는 이성을 초월하여 실제로 형상화된 약속의 말씀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마노아의 부부가 얼마나 상상력이 많은지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자 사사기 13장 12절에 ꡒ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ꡓ하며 마노아는 지금 ꡒ낳을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 그 키우는 방법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아직 아내가 아이를 잉태하거나 출산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자녀 교육을 생각할 정도로,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하게 믿는 믿음의 신앙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환경이 아직 변하지 않고 굳게 닫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부부는 약속의 말씀을 형상화 시켰고 더 나아가 태어날 아기에 대하여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를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과 능력을 이룰 수 있는 은혜의 비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막힌 환경이, 막힌 물질이, 건강이, 취업이 조금도 열릴 기미나 풀릴 움직임도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환경이 열려지고 풀려지는 회복의 현장을 상상하며 마음으로 감사하며 감격과 기쁨 속에 살아갈 때에 오늘 우리의 사역현장에서도 동일한 능력과 기적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노아의 부부처럼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나 저 언덕너머 열려질 축복의 세계, 응답의 세계를 바라보며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신뢰와 확신의 믿음, 축복의 믿음이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이런 담대한 믿음, 신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4)

이렇듯 말씀을 형상화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마노아 부부는 괴력의 힘을 가진 14대 사사 삼손을 출산할 수 있었습니다.



      2.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기적


      지난 주 낮 설교제목이 죽은 지 사흘이나 된 나사로 그것도 죽어 무덤에 묻힌 나사로를 살려내는 회복의 역사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최대 메시지는 현재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 할 때에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성경공부를 하고 웬만큼 교회를 다닌 성도들은 다들 갖고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적인 믿음이다 보니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과거의 믿음, 미래의 부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현재의 믿음입니다. 과거에 내가 어떤 믿음을 가졌고 어떤 역사를 일으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미래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 보다도 현재 내 믿음이 어떤 상태 있는가? 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각인시키기 위하여 다시금 말을 받아 질문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해 역시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는 이성적인 고백에만 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고백을 하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믿음으로는 역사가 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답답한 마음으로 실물설교를 하시고자 “그를 어디다 두었느냐?”물으시고 무덤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리고서는 이번에는 다시금 “무덤문의 돌을 옮겨 놓으라”(39절)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너의 판단하는 그 이성적인 믿음을 중단하고 나의 명한 것을 좇아 순종함으로 행하다보면 너에게도 현재 살아 역사 하시는 부활의 능력 즉 나사로의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굳게 닫힌 이성의 문을 열어 오라버니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 나오는 상상의 모습을 믿음으로 재현시키지 못하고 결국 “ 예수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며 말을 건네고 말았습니다.


이 말의 뜻 속에는 3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① 헛수고하지 마십시오. ② 늦게라도 오신 것만 해도 저희는 족합니다. ③ 나사로의 일로 불행한 사태(놀리움, 조소, 돌 던짐)를 촉발하지 마옵소서 』하며 걱정하며 위로하듯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성은 교만하고 악합니다. 불순종합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더디 믿는 자들을 향해 안타까워하시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에 열려진 돌무덤을 향하여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43절)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이름만 부르며 깨우는 것이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지금 무덤에서 걸어나오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음성을 듣고 죽어 이미 매장됐고, 냄새까지 풍기고 있던 나사로가 얼굴은 수건에 싸인 채로, 수족은 베로 동인 채로, 매우 불편한 몸을 이끌고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그런 나사로를 예수님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44절)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죽은 나사로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의 부활로 다시 나타났습니다. 육체의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축복된 일입니까?


나사로의 회복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최대의 메시지는 ‘현재의 부활’로 이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서는 우리 속에 잘못 고정되어 있는 고정관념과 부정적인 생각들을 버려 버리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시든지 믿고 순종하여 따르다보면 다시 말해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고 돌을 굴리다 보면 그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오라버니가 무덤에서 살아 나올 것을 상상으로 그리고 순종하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 나아만 장군의 병고침


    이번에는 아람나라 군대장관 나아만의 회복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나아만은 이방인이었으며 문둥병에 걸려 온 몸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문둥병에 걸리기 전까지 나아만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었습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한꺼번에 소유한 성공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찾아온 문둥병이라는 이 엄청난 장애로 인해 지금 그의 전 존재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나아만 으로서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문제였고 피하고 싶은 모습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그가 직면한 인생의 현실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자기의 권력과 부를 이용하여 자신의 병을 고쳐보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녀 보았지만 그때마다 헛수고였습니다. 그런 나아만에게 자신이 이스라엘 땅으로부터 포로로 잡아온 아내의 하녀가 던진 한 마디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문둥병을 고치리이다"(왕하5:3)는 말에 혹 해가지고 아람 왕 앞에 나아가 계집아이의 말을 고하면서 ”나로 하여금 사마리아의 선지자를 찾아가 문둥병의 고통에서 해방 받게 하옵소서”(왕하5:4)하고 청원을 하였습니다. 이런 간청을 나아만이 왕에게 드리기 전까지 그 나름대로 선지자로부터 안수를 받고 자신의 병이 깨끗하게 고침 받은 것을 지각으로 상상했기 때문에 왕 앞에 나아가 간청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 증거가 엘리사 선지자는 나오지도 않고 종 게하시로부터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 5:10)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 나아만은 “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 5:11)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이렇듯 나아만은 엘리사 앞에 서기까지 나음에 대한 분명한 상상의 그림을 그렸고 그 확신을 좇아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나와보지도 않고 종을 시켜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 5:10)는 말을 들을 때에 그 상상의 믿음, 소망의 믿음은 어디로 가버리고 교만한 이성이 싹을 터서 분통을 떠트리며 돌아가자고 한 것입니다.

이 같은 비슷한 예가 은혜 받는 집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은혜를 받으려고 열심히 아멘도 하고 헌금도 하고 뜨겁게 소리질러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순종하여 상상의 나래를 열어 믿음으로 나오면 각종 병 고침과 은사와 기적의 축복이 일어나는데도 불구하고 그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을 세우고 이성적인 만족과 지성적인 믿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을 봅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교만한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곁에 좋은 신하를 둔 나머지 나아만은 요단강 물에 들어가 몸을 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여 한번 두 번 세 번 ... 그리고 일곱 번까지 씻는 동안 불순종과 원망과 불평의 마음은 점차 사라져가고 고침 받고 새롭게 되어져 나타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순종한 결과 정말 약속하신 말씀대로 문둥병이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으며 그 살결이 어린아이의 살 같게 되었습니다.(왕하5:14)


이 같은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에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를 앞세워 일곱 번 돌라 그리고 이 성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외치라 할 때에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하루에 한 바퀴씩 성을 돌았겠습니까? 분명 성이 무너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을 장악할 것을 상상하며 믿음으로 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맨 처음에는 이렇게 성을 돈다고 해서 과연 성이 무너질까? 그 단단한 돌 성이 어떻게 무너질까? 괜한 헛수고야? 하는 불평의 마음, 원망의 마음, 등 불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육일 동안 여리고 성을 도는 동안 불순종의 믿음이 순종의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을 정복하고 승리의 함성을 여호와께 드리는 상상의 장면이 확신의 능력으로 다가와 믿음으로 외칠 때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듯 긍정적으로 상상하고 순종하는 믿음, 겸손한 믿음,

“나는 할 수 없지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빌4:13)는 행동하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승리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믿음의 주인공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4. 혈루병 여인의 치유기적


     우리는 지난 목요일 저녁에 혈루병 여인의 치유기적을 말씀드리면서 이 같은 상상의 믿음, 순종의 믿음, 행동의 믿음이 얼마나 있는가? 실습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많은 성도들이 지식적인 믿음, 이성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혈루병 여인이 “내가 예수님께 직접 나아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내 병이 깨끗하게 고침 받을 수 있을 것이다.”(막5:28)는 생각을 갖고 예수님께 나오기까지 많은 고난과 아픔이 있었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됩니다. 마가복음 5장 26절에 보면 “여인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이로 인해 있던 돈도 다 허비하였으나 아무 효험이 없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혈루병 여인이 예수님께 나오기 전까지 이런 방법 저런 방법 다 써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더 고통뿐이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께 마지막 치료의 희망을 걸어보면서 더 이상의 자존심이나 체면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나는 예수님으로부터 내 병을 고침 받아야한다, 그리고 분명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갈망을 가지고 찾아갔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가 없었던지라 그녀의 애타는 마음은 더 끓어서 다시금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낳을 것이다 는 상상과 확신의 믿음을 가지고 나간 결과 그 믿음대로 12해를 앓던 혈루병의 근원이 끊어졌습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부로 느낌으로 체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병고침의 축복이 상상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믿음의 상징으로 표현되기 위하여 예수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고 담대하게 자신의 나음을 알리는 여인을 향하여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막5:34)는 축복을 해주시므로 실제적인 부활의 믿음과 능력으로 각인시켜 주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말하고 싶은 곁가지 이야기 중 하나는 인생의 절박성 다시말해 물질의 절박성, 건강의 절박성, 영적인 절박함이 없을 때 예수님의 사랑을 인식하지 못하고 교회에 나와서도 형식적인 예배로 일관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성도들 속에 늘찬양교회의 위기를 남의 이야기로 알고 참석한 사람은 그만큼 오늘 은혜 받는 일에 미약하게 되며 참 능력의 형상을 그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발등의 불이 떨어진 상태이고, 또 뒤로 후퇴할 수도 없기에 죽기 살기로 주님께 매어 달리다 보니 이 같이 능력의 받는 축복의 통로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고난이 있고 가시가 있고 약함이 있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그 고난과 가시와 약함을 통해서 더 크게 채워주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기대하며 상상하며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놀라운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날마다 역사 하는 교회와 성도님들이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고린도후서 12장 9절 말씀에 “내 은혜가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ꡓ 는 말씀처럼 나의 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축복의 장소와 선물이라는 것을 믿고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모세가 바란 광야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탐지하기 위해 각 지파 중에서 한 사람씩 뽑아 12명의 정탐꾼을 보내는데 그때 열 명의 정탐꾼은 이성으로만 보고 와서는 “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민13:27-29)하였으며 또 32-33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31절에서는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 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하였습니다.


그러나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이성으로만 본 것이 아니고 4차원의 영의 눈으로 상상하며 그림을 그린결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4:7-9)고 보고하였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보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10명의 정탐꾼의 보고와 여호수아와 갈렘의 보고는 전혀 달랐습니다. 100% 달랐습니다. 어떤 차이입니까? 바로 예수님 안에서 긍정적인 상상을 하며 하나님의 축복하실 것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달려나간 사람과 이성의 눈만을 가지고 지각으로 판단한 사람들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 마노아의 잉태 기적을 통하여    2.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기적을 통하여

3. 나아만 장군의 병고침을 통하여  4. 혈루병 여인의 치유기적을 통하여 그리고

5. 열두 정탐꾼의 보고를 통하여

하나님의 기적의 축복이, 능력의 역사가 어떻게 들어가고 어떻게 나타난다는 것에 대한 공통점을 찾았습니까?


그것은 이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믿고 축복해주실 것을 응답해 주실 것을 상상으로 생각하며 마음에 형상화시킬 때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속에 환난이 많고 시련이 많고 약함이 많다는 것은 더 하나님을 가까이 찾고 더 깊은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생각하고 더 큰 믿음의 세계와 축복을 상상하며 늘찬양함속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막16:17-18)는 능력의 세계를 드러내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능력의 역사, 축복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늘찬양교회와 성도들의 삶 속에 영원토록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