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폴 투르니에  (2006-07-24 오후 7:45:30, 조회 : 1933)
출판사  
  IVP 

제목  
  고통보다 깊은



/ 오수미 옮김
 / 2004년 11월 / 253쪽 / 9,000원

▣ 저자  폴 투르니에
스위스의 내과 의사로서, 기술적인 의학만이 존재하던 시기에 의사와 환자가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인격 의학’을 주장했으며, 심리학을 기독교와 통합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의 심오하고도 실제적인 사상은 저서와 강연을 통해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저서로 『강자와 약자』, 『고독』, 『모험으로 사는 인생』, 『비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 『여성, 그대의 사명은』, 『죄책감과 은혜』, 『현대인의 피로와 휴식』, 『당신은 하찮은 존재인가』 등이 있다.

▣ 역자  오수미
오수미는 한국 외대 불어과를 졸업했으며, IVP 편집부 간사로 일한 바 있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번역 및 교열 작업을 하고 있다. 역서로 『현대 사상과 문화의 이해』,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헌신』, 『왜곡된 진리』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20세기 기독교가 가장 사랑한 상담자, 폴 투르니에의 마지막 작품으로 고통에 대한 신학적 접근보다는 임상적, 체험적 접근을 통해 일생의 연구와 경험이 잘 정리된 작품이다. “고통은 일상성의 껍질을 부수고 창조적인 삶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라고 역설하는 이 책은 고통을 특별히 창조성과 연관시킨다. 저자는 고통 자체가 축복이며 은혜라고 말하기보다는, 고통에 대한 용기 있는 반응이 창조적 에너지를 낳는다고 말한다. 좋은 날씨를 진정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나쁜 날씨가 계속되어야 하듯이 고통과 창조성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즉 고통이 있다고 반드시 성숙하거나 창조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지만, 창조적인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상실과 시련으로 인해 오히려 이제껏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게 되는 과정을 폴 투르니에만큼 섬세하고 치밀하며 인격적으로 묘사한 저자는 찾기 힘들 것이다. 

▣ 차례
서문: 고아에 관한 수수께끼
제 1장 창조성으로 이어지는 상실
제 2장 위장된 축복?
제 3장 승리인가, 패배인가?
제 4장 상실과 좌절
제 5장 난관으로 지연되는 수용
제 6장 분노
제 7장 용기
제 8장 정보 이론에서 말하는 잡음
제 9장 일상성과 창조성


서문: 고아에 관한 수수께끼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

이 책의 출발점은, 제네바의 피에르 렌취니크 박사가 「의학과 위생학」지에 발표한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라는 놀라운 제목의 논문이었다. 그는 세계사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정치가들의 전기를 읽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모두가 고아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이 놀라운 발견으로부터 ‘정치적 권력 의지의 기원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이끌어냈다. 정서적 좌절로 인해 생긴 불안정이 이 아이들에게 이례적인 권력 의지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러한 의지로 그들은 정치계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세계를 변화시키고’, 가능한 한 크게 성공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말이다.

나는 태어난 지 두 달만에 아버지를 잃고 다섯 살 때 어머니마저 잃은 고아이기에 이 논문에 특히 더 관심이 갔다. 그 때는 아내가 죽은 직후였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니 세 번째로 고아가 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항상 내 자신이 평화적이고 타협적이라 생각해 온 나는, 혹시 무의식적으로라도 전혀 평범치 않은 권력 의지에 이끌렸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정치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지만, 학창 시절에는 정치적 사안에 상당히 민감했다. 최근에 전차를 타고 가다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났는데, 두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즐거웠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 친구가 먼저 내리면서 길에 서서 나를 향해 외쳤다. “우린 모두 자네가 언젠가 스위스 대통령이 될 거라 장담했었다네!” 

어쨌든 나는 의사가 되었고 의술은 ‘제 4의 권력’이라고 불리울 만큼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 소명은 단순히 의술만은 아니었다. 렌취니크 박사에게 나의 종교적 소명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가 한 말을 기억한다.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 역시 고아였네!” 모세는 버려진 아이였으며, 부처 역시 고아였고, 마호메트는 한 살도 되기 전에 부모를 여윈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신의 이름으로 말하라는 부르심을 느끼고, 자신이 신의 대변인으로서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경청한다면 그에게 어떤 권력 의식이 생길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철학자로서 진리를 가르칠 때도 그런 의식이 생길 수 있다. 고아였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장 폴 사르트르의 저서 『말』을 보면 위대한 설교자와 철학자가 줄곧 어떤 특권을 누려 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그들의 영감 있는 가르침 때문만이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자질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루소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데카르트는 한 살 때, 파스칼은 세 살 때 각기 어머니를 잃었다.

결국 무의식적인 권력 의지가 대다수 저명한 인물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들이 이 의지로 하나님과 사람들, 문화에 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좋은 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 사이에 의견 일치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을 지고한 진리의 수호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타협적이며 관용적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종교 전쟁과 이데올로기적 혁명이 가장 맹렬한 싸움에 속하는 것이다. 신학적 광기는 이러한 오랜 역사를 표현한다. 권력에 대한 갈증은 이 세상의 위대한 인물들을, 또한 우리 각자를 가장 고귀한 행동으로 이끌기도 하고 가장 비열한 행동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1장 창조성으로 이어지는 상실 
“좋은 날씨를 정말로 즐기려면 그 전에 나쁜 날씨가 오랫동안 계속되어야 한다.”

렌취니크의 글을 보충한 정신 분석학자 앙드레 에이날 교수는 자신의 글에 “고아와 연관시켜 본, 상실에 관한 정신 분석학적 고찰”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나는 이 논문을 열정적으로 탐독했다. 이 글은 정신 분석학이 명철하고 지혜롭게 이용되기만 한다면 고아의 삶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정서적 기제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유익한지를 보여 주었다. ‘상실’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본 논의에 매우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고아는 한 부모나 모두를 상실한 사람이다. 하지만 인생에는 다른 ‘상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이 존재하는가! 

여기서 끌어낼 수 있는 추론은 분명하다. “모든 사람이 고아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고아로 태어난다. 고아는 단지 인간의 근원적인 경험을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강렬하게 겪을 뿐이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 모두와 관련이 있는 상실과 유한성의 경험이다.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인생의 모든 시련과 연관되는 것이다.

렌취니크 박사는 고아들의 사례를 통해 권력 의지를 언급한 반면, 에이날 박사는 창조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창조성을 부여받은 정치가가 지도자가 된다.” 권력 의지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도움이 되는 힘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삶이란 변화이며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지도자는 사람들이 변화에 적응하도록 돕는 사람이다. 그것은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에 관한 문제다.” 과학계에서도 천재는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는 사람이며, 이는 주로 창조적 직관의 기능이다. 그래서 에이날 박사가 제시한 창조성을 발휘한 인물의 예를 살펴보면, 렌취니크의 목록보다 예술가나 작가들이 훨씬 더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사별, 손실, 상실의 과정과 창조성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창조적인 예술가들 가운데 고아의 비율이 높은 것을 보면 깊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사생아였고 바흐는 고아였다. 몰리에르, 라신, 스탕달, 보들레르, 카뮈, 조르주 상드, 키플링, 에드가 엘런 포우, 단테, 알렉상드르 뒤마, 톨스토이, 볼테르, 바이런, 도스토예프스키, 발자크 등도 모두 고아였다. 

역사적인 예들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창조성이라 하면 우리는 먼저 르네상스를 떠올리게 된다. 매력적인 명칭, 그리고 그와 결부되는 온갖 귀중한 산물들로 인해 우리는 르네상스를 일종의 황금기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시대 전문가인 콜레지 드 프랑스의 장 들뤼모는 이 시기를 역사상 가장 불길하고 무서운 위기에 처한 시대 중 하나로 묘사한다. 르네상스는 터키족, 페스트, 무장한 패거리들의 약탈, 마녀 사냥, 잔인한 종교 전생의 위협이 있던 시기였다. 카톨릭과 개신교 신자들 모두가 묵시적 종말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공포가 전 유럽을 휩쓸었지만, 근대 사상의 기초가 세워지고 생산적인 과학적 방법론이 발전하며 예술가들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은 바로 이런 절망스러운 분위기에서였다. 

마찬가지로, 그리스 사상의 최고 전성기였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는 아테네의 전성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대는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비참하게 패하여 운명의 종말을 고한 이후였다. 예레미야가 등장한 시기도 예루살렘을 파괴하려는 외세의 침략이 임박할 무렵이었다. 이사야 선지자의 노래가 나온 것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절망적인 포로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으며, 에스겔이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외친 것도 그 때였다. 예수님 또한 가장 가혹한 정권기인 외세의 야만적 점령기에 태어났다. 

우리는 질병, 노화, 죽음, 상실, 인생의 갖가지 시련에 부딪힐 때 우리 자신의 깊은 관심사 앞에 홀로 서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지, 아니면 이런 불행이 일련의 운명적인 사건일 뿐인지 묻는다. 가장 엄청난 불행과 가장 귀한 축복 사이의 관계, 그 낯설고 혼란스럽고 부당한 연관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때도 우리는 혼자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다소 불편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이 둘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즉 개인의 삶에서든 국민 전체에게든 인간에게 닥친 불행과 그들이 누리는 유익, 그들의 발전과 창조성이 관계가 있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의식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인과 관계임을 시사한다면, 그로 인해 제기되는 문제가 얼마나 어렵고 복잡하고 위험하고 무시무시하기까지 할 것인지도 모두 느끼고 있다. 고통이 결국 유익을 가져온다고 생각하면 고통에 대항해 힘껏 싸우고자 하는 우리의 결의가 약해지지 않겠는가?

2장 위장된 축복?
“고통은 그 자체로는 결코 이로운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련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최근 몇 세기 동안 물질적 결핍에 대항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져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삶의 시련과 실패 앞에서, 그리고 질병과 죽음 앞에서 영적 상실감이 커져 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것은 또한 서구의 비기독교화로, 내적 삶과 신앙심의 고갈로, 삶의 의미 상실로, 고통과 죽음 앞에서의 더욱 심한 좌절로, 리즈만이 말하는 ‘군중 속의 고독’으로, 그리고 리쾨르가 말하는 ‘산업 사회의 권태’로 귀결되었다. 번창하는 이 물질주의 세상은 건강과 부와 성공을 치켜세우며 고통과 상실의 가치를 무시했다. 반면에 종교계는 고통과 상실의 미덕을 일깨우다가 지나치게 비약하여 큰 위험에 빠질 여지가 있다. 여하튼 모든 종류의 상실에 필사적으로 대항하는 불신자 진영과, 단념을 강조하는 신자 진영이 나뉜 것 같다. 엄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유익을 위해 고통을 가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진보를 위해 인간이 고통당하는 것이 자연과 운명의 법칙이라며 종종 막연하게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어떤 철학자도 풀지 못한 악의 기원에 관한 문제를 다루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는 선과 악이 뚜렷이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부모와 교사들은 어린아이들에게 이 점을 인식시키고자 최선을 다한다. 전설과 동화는 용감한 사람들과 악의 화신 같은 인물을 어김없이 대치시킨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러한 환상이 깨지고, 우리는 악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악은 우리의 가장 고상한 행위 안에도 교묘하게 스며들어 있다. 사랑 안에 숨겨진 이기심이 얼마나 자주 속박이나 학대로 바뀌어 버리는가! ‘선행’ 속에 얼마나 큰 자만심이 들어 있을 수 있는가! 가장 이타적인 정치사회 운동 속에 얼마나 많은 증오가 도사리고 있는가! 

예수님은 인간 정신의 무의식적 영역을 꿰뚫어 보실 수 있었다. 그분은 ‘의인’의 죄를 준엄하게 비판하셨다. 그 죄는 겉으로는 덕의 형태를 취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이 견지에서 복음과 현대 심리학이 일치한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이나 행위의 동기를 조사해 보면, 우리가 숨쉬는 공기에 들어 있는 산소와 질소처럼 최상의 것과 최악의 것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즉시 알게 된다. 성경은 그 사실을 선포하고 우리 경험은 그것을 확증한다. 예수님은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 이 둘이 섞여 있음을 상기시키시며 추수할 때까지는 둘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선과 악 사이에는 그 어떤 혼동도 있을 수 없다. 혼합은 있을 수 있으나 혼동은 있을 수 없다. 알곡은 하나님이 뿌린 것이고 가라지는 ‘원수’의 소행이다. 가라지 씨에서 어떤 곡식의 이삭도 나오지 않으며, 알곡에서 어떤 가라지도 자랄 수 없다. 선은 선에서 나오며 악은 악을 낳는다. 악이 선의 원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실 혹은 고통과 창조성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언뜻 보기에 그것은 선과 악의 관계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심하라. 관계와 원인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성숙하고 발전하고 더욱 창조적으로 변했다면, 그것은 상실 자체 때문이 아니라, 시련 앞에서 적극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에, 즉 올바르게 싸웠으며 도덕적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도덕적 견지에서 선과 악은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인격 속에 존재한다. 사물과 사건은 행운에 속하든 불행에 속하든 그냥 존재하는 것일 뿐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통제할 수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반응에 책임을 진다. 여기서 자유의지라는 논쟁적 주제를 철저히 규명할 의도는 없지만 우리가 사건에 반응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기에는 이미 그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그 시점에 우리는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문제다.

끝으로, 나는 지금까지 직업 경력을 통해, 사람이 심각한 정신적 충격의 결과를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극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었다. 상실을 별로 겪지 않은 특권은 퇴보를 의미하지만 사랑의 도움이 없는 상실은 파국으로 끝나고 만다. 인간 정신에서 상실이 열매를 맺게 하는 결정적 요인은 사랑이다. 그것이 바로 내게 일어난 일이다. 내 운명을 바꾸고 고아라는 불리한 조건에서 해방시켜 준 것은 나를 입양한 가정과 그리스어 선생님, 그리고 내 아내와 다른 많은 사람들, 무엇보다도 옥스퍼드 그룹 친구들의 진정하고 인격적인 사랑이었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그분은 그분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 많은 사람들을 쓰시어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푸셨다. 

그렇다. 의사인 내가 환자를 진료하면서 깊이 감동받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프거나 시련을 당한 사람이 내게 속사정을 털어놓았다고 하자. 앞서 고아의 사례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어떤 반응은 역사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고, 어떤 반응은 실패한 삶으로 끝날 것이다. 또한 적절한 시기에 적절히 주어진 도움은 한 사람의 인생 행로 전체를 좌우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눈덩이 효과(snowball effect)'와 같아서, 용감하게 행동하면 새로운 힘과 희망이 솟아나고 다음 번에 더 쉽게 승리하게 된다. 반면 좌절하게 되면 한 번 좌절할 때마다 계속 더 움츠러들게 된다.  

3장 승리인가, 패배인가?
“치료의 기회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해도 성장할 기회, 인생의 성공을 거둘 기회는 남아 있다.”

환자 앞에는 늘 두 가지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다. 회복될 것인가, 아닌가? 시련 속에서 성장할 것인가, 아닌가? 환자에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의사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있다. 의사는 치료 행위를 하며, 또한 파스칼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환자가 자신의 병을 선용하도록 도와야 한다. 의사라는 직업에 ‘치유와 인격 성장을 돕는 임무‘라는 인도주의적 의미가 부여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한계 상황’에 빠진 사람들을 늘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계 상황이라 함은 병이나 다른 불행이 갑자기 그들의 일상에 침범하여 자신의 운명과 대면하게 되는 긴급한 순간이다. 사별, 신체 장애, 결혼 생활의 갈등과 같은 다른 상실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은 우리 자신의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나의 친애하는 동료 의사들이여, 과학적 객관성의 벽에서 빠져나와 환자에게 인격적인 방식으로 말하라. 그대의 삶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간들, 그대가 오랫동안 치러야 했던 투쟁, 그대의 저항, 그대가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라. 그것은 행복한 경험이기도 하다. 서구 문명권에 밀어닥친 심리적 장애의 큰 파도는 전문적인 심리치료사 홀로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내가 의학계에서 목격하듯, 우리 시대의 불행은 많은 진보를 가져다 준 전문화가 아니라 전문가들이 점점 더 폐쇄적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주창한 ‘인격 의학’은 또 하나의 전문 분야가 아니다. 이 의학의 태동을 위해 심리학, 사회학, 신학, 철학 지식을 의사 양성 과정에 보태면 된다. 환자는 의사가 보여 준 지대한 관심에 감동한다. 

진료와 관련된 아주 세부적인 사항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치료는 생물학적인 현상, 그러니까 생리학적, 화학적 현상을 매개로 일어난다. 온도가 4도 올라갈 때마다 화학 반응의 속도는 두 배 빨라지는데, 이것은 기하급수적으로 가속된다. 그런데 이러한 온도 변화에 따른 가속 현상처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영적 에너지가 가속 효과를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 지을 이유는 없다. 영적 에너지의 가속 현상으로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 사역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역사 속에서나 오늘날 오순절 운동에서도 그러한 치유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의사가 되기 전에 영적 치료자였던 프란체스코 라카넬리 박사가 생명 방사(bio-radiant) 에너지라고 부른 현상일 것이다.

사람은 인생에서 스스로 성공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결정적인 경험들에도 한계가 있다. 그 경험들 중 가장 위대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도 사도 바울에 따르면 보증에 불과하다(고후 5:5). 그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롬 8:24)라고 말한다. 즉 우리의 구원은 소망의 대상이다. 따라서 환자에게 말할 때, 생명을 유지하려는 격렬한 투쟁에서 지더라도 인격적으로 성장하면 보상받을 수 있다는 듯이, 이러한 투쟁과 인격적 발전을 나란히 놓는 것은 불합리하다. 내가 인격 의학에서 말하는 ‘의사의 또 다른 임무’란 다른 사람을 성장시키는 문제가 아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성장시킬 수 없다. 우리 환자들은 삶의 경험에서 유익을 얻는 정도만큼 자연히 성장한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이 행한 일이란, 이미 히포크라테스가 제창한 의학 전체의 위대한 원리를 심리학에 적용시킨 것이다. 그 원리는 바로 자연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에 의지하는 것과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은 같다. 그분은 자연의 창조주이시기에 자연 안에 숨어 계시며, 영혼이라는 초자연적 세계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듯 자연 안에서도 그렇게 하신다. 초자연적인 치유와 자연적 치유를 상반된 것으로 설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치유와 모든 인격적 성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현대 심리학과 복음이 완전히 일치하는 또 다른 부분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적해 보이신 모델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는 공중의 새와 들의 꽃이며 어린아이들이다. 그분은 완벽을 성취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바리새인들을 통렬히 비난하시면서, 그분의 발 아래서 우는 가난한 여성과 비교하셨다. 이 여인은, 우리의 진료실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지만 힘든 처지에서 성장해 가는 많은 사람들과 같다. 우리 의사들은 그들의 성장을 위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의사로서 나의 임무는 환자의 말을 듣는 것이며 그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 그에게 스스로 표현할 기회를 주는 것, 그가 현재의 시련 속에서 던지는 질문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언제든 그와 대화를 나눌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그가 인생의 모든 시련 중 가장 가혹한 시련에 직면해 있다면, 즉 최고의 상실인 죽음으로 가고 있다는 염려를 하고 있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임무다. 

이러한 더 넓은 관점은 의사의 사명에 더 큰 차원, 더 큰 열정을 부여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과학적 문제들을 제기하는 사례 그 이상의 세계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치유와 인격 성장 둘 다를 위해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다리는 신앙적 태도다. 현대사회에서의 고독은 더할 나위 없이 큰 상실로서 우리 서구 문명의 특징이자 특히 인격 의학을 실천하는 의사들에게 적합한 주제다. 담당 의사에게 우울증, 기력 상실 등의 고통이나 불면증, 심장병, 소화기 질환, 그 외 많은 증상을 호소하는 수많은 환자들이 실제로 앓고 있는 병은 고독이다. “영혼이 침묵할 때 몸이 소리를 지른다.”는 하인리히 후엡슈만의 말처럼 인격 의학을 실천하는 의사는 이러한 숨겨진 고통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두 가지 고독 중 하나는 그분이 사역 초기에 경험한 고독으로 광야의 유혹과 관련된다. 그것은 스스로 뛰어든 고독으로서, 성령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며, 들떠 있는 우리 현대인들이 별로 실천하지 않는 일종의 묵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고독은 자기를 발견하고 개인적 소명을 깨닫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그분은 사역 마지막에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에서 무서운 고독을 경험하셨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는 고독으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의 배신과 버림이 있었다. 심지어 그분은 하늘 아버지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스스로 택한 생산적인 고독과,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온 비극적인 고독을 뚜렷이 구분하는 것은 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후자의 고독도 후에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본질적인 것은 문제 -고독- 가 아니라 문제에 직면한 사람의 태도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겨운 묵상을 하는 동안 아버지의 뜻을 발견하려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의 죽음을 원하는지 알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다가올 죽음을 받아들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이 둘은 아주 다른 태도다. 나는 하나님이 결코 죽음을 바라지 않으시며 생명을 원하신다고 확신한다. 그분은 병이 아니라 치유를 바라신다. 나는 우리 의사들이 죽음과 질병에 대항해 싸울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분은 타락 이후 세상에 질병과 고통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를 부르셨다. 또한 사람들이 이 잔인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셨다. 

예수님 자신이 이러한 현실, 온갖 약하고 짓밟히고 경멸당하는 사람들을 직시하셨다. 그분이 말하는 팔복은 미래에 주어질 복이다. 가장 작은 자가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가 되는 것은 미래의 일이다. 그런데 그분은 이미 일어난 일처럼 말씀하신다. 나는 복음의 이 역설적 관점으로 내 직업 생활을 꾸려 왔다. 따라서 내 동료들에게 그들이 몰두하고 있는 기술적 문제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라고 권면할 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 “훨씬 더 멀리 내다보라.” 그러면 조바심 내거나 낙담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많은 환자의 향후를 수십 년 동안 주시했고 83세가 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짧은 기간에 수많은 환자를 진료할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4장 상실과 좌절  
“슬픔이 크면 클수록 슬픔이 생산하는 창조적 에너지도 커진다.”

에이날 박사가 말하듯 모든 정신 분석학자는 “욕구의 자동적 만족, 어떤 종류의 좌절도 없는 상태”를 비현실적인 개념으로 본다. 결핍, 좌절, 상실 이 모두는 비슷한 의미다. ‘결핍(privation)’이란 단어는 정서적 의미를 함축하지 않고 객관적 사실을 표현한다. 정신 분석학자들이 널리 유포한 ‘좌절(frustration)'이란 단어는 그것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해로운 요소나 파괴적 반응들을 상기시킨다. 이 책에서처럼 박탈의 경험에서 흘러나올 수 있는 창조적 유익을 표현하고자 할 때는 ’상실(deprivation)'이라는 단어가 필요할 것이다. 프로이트주의자들이 좋아하는 또 다른 언어는 ‘거세(castration)'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상실의 다양한 형태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항상 두 가지 반응의 딜레마로 돌아오게 된다. 셀 수 없이 많은 요인, 그러니까 의식적, 무의식적, 신체적, 도덕적, 문화적 요인들의 복잡한 연결망 전체가 우리 행동을, 즉 파괴적 행동 혹은 창조적 행동을 결정한다. 내가 에이날 박사의 글을 읽으면서 특히 놀란 이유는, 과거의 프로이트가 이 문제에 얼마나 몰두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것을 잃어버리기 위해서는 무엇으로 그것을 대체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것을 무엇으로 대체하는가? 그것이 문제다. 파괴적인 반항인가 아니면 창조성인가?

창조성을 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하며, 프로이트가 ‘애도(mourning)' 작업이라 부른 내적 성숙의 전체적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해 두어야 할 내용, 바로 프로이트의 ’승화(sublimation)' 개념이다. 그는 창조성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다루었으나 결국 내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 전체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이 승화 개념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에 부딪혀서 당구공처럼 동일한 힘을 가지고 새로운 방향으로 튀는 특수한 심적 에너지다. 여기서 공이 캐넌을 칠 때 쿠션 역할을 하는 것이 상실이라 할 때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승화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관계가 있으며 이에는 애도가 포함된다. 여기서는 프로이트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관련하여 사용한 ‘애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고아와 과부’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는 둘 다에 해당된다. 그런데 7년 전 아내가 죽은 이후로 내게 창조적 욕구가 새롭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아내와의 사별을 가볍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할까 봐 두렵지만, 이것은 슬픔을 부정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슬픔이 크면 클수록 슬픔이 생산하는 창조적 에너지도 커진다. 나는 고통 받는 자들 곁으로 더 다가갔고 그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슬프다. 홀로 늙어가는 것은 함께 늙어 가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아내와 나누었던 풍성한 대화다.

나의 모든 활동이 프로이트가 말했던 ‘애도 작업’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아내와 교제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 했으며 지금도 그렇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아내의 보이지 않는 실재를 강하게 느끼고 있다. 내 마음에 살아 있는 것은 옛날보다 더 생생한 바로 지금 그녀의 실재다. 어떤 이들에게는 고인의 실재가 퇴보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인 반면, 내 아내의 실재는 생기 있고 활력을 불어넣는다. 나는 아내의 죽음 이후로, 내가 평생 애도 속에서, 즉 천국에서 내 부모님과 다시 만날 것을 기다리며 살아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내는 죽기 직전에 그곳에서 그분들을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예전부터 그렇게 느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평생 부모님의 보이지 않는 실재 속에서, 그분들의 삶의 특징이었던 믿음과 사랑, 그리고 시적인 분위기에서 살아온 셈이다. 이제 새로운 사별을 겪으며 나와 천국은 더욱 강하게 연결되었으며, 그로 인해 이 세상 문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커졌다. 인간의 마음은 논리의 법칙에 전혀 굴복하지 않는다. 나는 큰 슬픔을 안고 있지만 동시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의미의 애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프로이트의 애도 작업은 분리(detachment)이며 정신분석학자들이 종종 사용하는 단어로 투자의 회수(disinvestment)에 해당된다. 그는 그것을 ‘상실한 대상과의 애착을 끊어 내는 문제’라고 썼다. 따라서 그의 제자 라가쉬 박사는 그것이 ‘죽은 자를 죽이는’ 문제라고 쓸 수 있었다. 재투자를 위한 투자 회수라는 이 기제가 프로이트의 승화 이론의 기초였다는 점에서 그의 사고는 기계적 모델에 근거해 전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기계적 장치로 바꾸는 것은 남자들이며, 따라서 우리의 남성적 문화는 거대한 비인격적 기계와 같다. 프로이트의 시대에는 과학의 명성이 절정에 달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기계적인 세계상, 어떤 의미도 목적도 없이 쉬지 않고 돌아가는 회전목마와 같은 세계를 보여 준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의사라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만년에 과학의 엄밀한 한계를 뛰어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과학의 한계를 인정한다. 과학은 방정식에 상응하는 시스템을 설정하고 기계적 작용을 설명하지만, 세계와 인간의 신비는 설명하지 않는다. 과학은 의학의 유용한 봉사자 역할을 하지만,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은 과학 이상의 것이다. 결국 프로이트는 싸움에서 이겼다. 정신 분석학이 의학으로 통합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사고는 날개를 달았다. 그는 『토템과 타부』나 『환상의 미래』에서의 연구도, 『모세와 일신교』에서도,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신화 연구도 과학 이론의 방식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연구와 다소 관점이 다르지만, 그가 스스로를 틀 속에 가두어 두지 않았다는 데 경의를 표한다. 

5장 난관으로 지연되는 수용  
“사고는 시간을 초월하지만 감정은 시간에 구속된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숨결로 태생부터 이기적인 인간에게 사심 없는 순수한 사랑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유전 암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초자연적 사랑의 욕구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겪게끔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갈등의 해결책은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을 새롭고 충만하게 받는 데 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사도 요한도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이 말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명령을 상기시킨다. “서로 사랑하라.” 게다가 위대한 종교는 한결같이 사랑을 가르친다. 

에리히 프롬도 『사랑의 기술』에서,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보편적으로 확대되기 쉽고 계산적이지 않은 형제애가 성적 사랑보다 우선적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성적 사랑은 필연적으로 그 자신의 만족을 좇는 자기 추구적인 성향의 본능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성은 그 단어가 암시하듯 생식의 측면에서 창조적일 뿐 아니라 종종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시발점이 된다. 유전 암호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지독한 이기심을 이겨 내고 형제애가 승리하게 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탁월한 영적 경험인 하나님, 즉 전적인 타자와의 만남으로 귀결된다. 

자신의 투자 기제와 그 한계를 모두 뛰어넘는 것, 그것은 깊은 친교(communion)다. 나에게 친교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만남을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거만한 태도에 대한 승리이며 우리의 실제 자아를 보호하려고 했던 가면을 벗어 버리고 자신과 타인, 자연, 아름다움과 나누는 깊은 친교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한계가 없는 고통과의 친교이며, 고통과 상실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용기다. 당신이 데카르트주의자라면, 그 생각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는지 내게 물을 것이나,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찾다가 그분의 생각이라고 판단되는 것을 약간의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받아들이면 된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부처도 어머니의 죽음에 깊이 상처받은 예민한 아이였기 때문에 인간 조건의 무상함을 일찍 깨닫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궁전에 격리시켜 놓고 질병, 곤궁, 노화, 죽음 같은 것들의 침입에서 그를 철저히 보호하려 했지만 그는 이런 것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부처, 즉 사리를 깨우친 인간이 되었다. 그는 우리를 덮치는 이러한 고통의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명상했고, 유일한 해답을 사심 없는 사랑,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상실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에서 찾았다. 상실의 문제는 눈을 감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용감하게 직시해야 해결된다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를 찾는 가운데 발견하는 우리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결코 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인생의 시련을 숙고하는 이 시점에서, 한계를 수용하는 것에 대해 말해야겠다. 수용은 우리의 성장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시련과 실패,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받아들이는 것을 특별히 더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개 그들은 어린 시절의 환경으로 인해 자신을 의심하는 성향이 있다. 그들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자기 확신과 안정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어려운 사건이 그들을 파멸시킬 수 있다. 한편 큰 시련은 상당히 잘 견디지만 사회 생활에서 발견되는 작은 모순에 대해서는 잘 참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 명령이나 도덕법, 혹은 단순한 우정의 충고로 상대방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받아들임은 결코 외부에서, 다른 사람의 재촉에 의한 체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안에서, 즉 완만한 내면적 변화에 의해 일어나는 과정이다. 당사자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당신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게 겪으셔야 했던 내면의 투쟁에 대해 잘 알 것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실 수 있는 것이 있다. 받아들이는 일을 가능하게 하고 우리를 그 과정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그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내게 고아라는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처럼 아내를 잃은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누가 나를 도와주었는가? 바로 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내게 하나님의 사랑까지 보여 주었던 이들이다. 시련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도구는 권고가 아니라 사랑이다. 

하지만 수용은 유예를 요구하며, 우리는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고는 시간을 초월하지만 감정은 시간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고를 통해, 모든 고난이 늦게라도 열매 맺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상실로부터 창조성이 흘러나오기도 함을 안다는 말이다. 최고 단계의 수용인 죽음의 수용에 대해 살펴보자. 쿠블러 로스 부인은 죽음을 향해 변화되어 가는 단계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충격 - 부정-반항과 분노의 감정-낙담과 우울-타협(항복이나 체념에 의해 운명을 진정시키기를 바라는 것)”의 긴 여정을 거쳐 환자가 평온한 수용에 이른다고 본다. 이 시점에 그녀가 ‘탈집중(decathexis)'이라고 부르는 변화가 종종 발생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거리를 두는 것으로, 죽어 가는 사람이 산 자의 세계에 전혀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더 말할 필요가 없어지고 죽어 가는 자의 손을 자상하게 붙들어 주기만 하면 된다. 자유를 가져다 주는 성장은 언제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든 현실에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쿠블러 로스 부인이 말한 단계들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노화의 수용’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쓴 디디에 뒤뤼는 자신의 연구 과정 기간 동안 서서히 성숙하여 삶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노화의 수용은 ‘소유’에서 ‘존재’로 진행하는 것으로, 청년기와 중년기의 탐욕에서 벗어나 온갖 종류의 포기-상실을 거쳐, 하고 있는 일, 성취한 것, 소유한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찾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늙어가는 것은 존재하는 것 그리고 완전한 탄생을 향한 변천이다.” 물론 연구 기간 중 그가 만난 노인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육체적으로는 쇠약하고 지식과 부, 명예, 활동성, 힘을 모두 상실했지만 삶과 평화, 심지어 행복의 향기를 발산하고 있는 노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6장 분노  
“극심한 통증을 느낄 때 단지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반항은 전염성이 있는데 수용 역시 그러하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내면의 평화를 찾게 됨으로써 자신에게 이롭고, 또한 다른 이들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논리적인 생각처럼 반항(분노)과 수용이 모순적인 것은 아니다. 분노와 수용은 이론상으로는 모순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손을 잡고 있다. 분노와 분노의 분출 과정을 거쳐야만 수용 단계에 이를 수 있다. 오히려 수용의 가장 큰 장애물은 표현할 용기가 없어서 억압된 분노다. 많은 심리치료가 이렇게 억눌린 분노를 분출시킨 뒤에야 효과를 발휘한다. 

프리츠 초른(Fritz Zorn; 프리츠 분노라는 뜻을 가짐)은 악성 임파종으로 죽어 가고 있던 서른두 살의 나이에 『화성』이라는 흥미로운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몸담았던 집단을 묘사했는데 거기서는 갈등 없고 조화로운 삶을 위해 모든 것이 희생되어야 했다. 모든 사람에게 깍듯하게 행동하는 착한 소년, 그러나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아이. 그는 대학에 가서도 잘 해 낼 수 있었고 박사 학위도 취득했으며, 교사가 되었고, 청중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희곡을 썼다. 그러나 그 자신은 결코 웃지 않았고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으며 외롭고 우울한 감정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심리치료의 도움을 받아 어느 정도 개인적인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외적 환경에 공허함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는 분노를 표현했으며 죽기 직전에 이 걸작을 썼다. 창조성이 터져나온 것이다.

성경을 펼쳐 보라. 모세, 욥, 선지자들 모두 거룩한 분노로 가득했다. 시편에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적인 찬미와 비난이 극적으로 함께 녹아 있다. 성경은 갈등, 즉 인간 사이의 갈등,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갈등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분노를 터뜨린 후에야 진정한 조화, 신앙의 조화가 일어난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에 하신 두 마디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이다. 최후의 순간에 예수님은 인간의 운명인 두 극단 “예”와 “아니오” 사이의 극도의 긴장을 체험하셨다. 모든 반항 뒤에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은 무의식적 열망이 숨어 있는 것 같고, 모든 수용 행위는 반항심으로부터 달아오르며 거기서 태어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의 개인사를 들여다보면, 거룩한 반항이 하나님과의 신실한 만남으로 가는 첫 발걸음이었다. 

“반항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 그냥 받아들여야 해”라는 것은 체념일 뿐이다. 이것은 수동적이고 우울하며 박력 없는 태도이며 일종의 실패 선언이다. 혹은 심리학적 용어로 억압이다. 반면에 진정한 수용은 적극적이고 생산적이며 강하게 발전할 수 있는 원천이다. 진정한 수용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아주 고통스러운 병으로 수술을 받은 내 친구가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했던 말이 있다. “고통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 표현에 감명을 받았다. 사실 너무 많은 사람이 수용과 체념을 혼동한다.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들으니, 용감하게 다이빙을 하는 것처럼 훨씬 더 적극적인 반응이 떠올랐다. 시련 앞에서 체념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삶의 새로운 단계를 직접 건설해야 한다. 그냥 기다리고 있기만 해서도 안 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무엇보다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완전히 참여하는 것이자 현 순간을 살아 내는 것이다. 그것은 가치관의 변화, 즉 새로운 영감의 추구를 함축한다.

고통에 대해 “예”라고 반응하는 태도는 하나님에 대해 “예”라는 태도로 바뀌어 간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받아들이셨기에 그리고 모든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기에 우리는 “예”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슬람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의식하다가 결국 운명론에 빠지고 말았다. 운명론은 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반면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린다.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를 부정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 거리를 뛰어넘으신 분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며, 그리하여 그분은 인간 조건의 무게와 긴장을 아셨다. 어쨌든 나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인해 현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시련을 당할 때 그분이 내 곁에 계시고, 임재하시며, 내 삶에 참여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고 믿는다면 모든 것에 당당히 맞설 수 있다.

7장 용기  
“절망하기보다 용감하게 맞설 때 고통이 훨씬 덜하다.”

어떻게 하면 불행이나 상실을 당한 사람들이 상실 그 자체에 의해 신선한 창조적 에너지를 발견하도록 도울 수 있는가? 그렇게 할 용기를 그들에게 불어넣어 주면 된다. 용기는 용기 있는 사람들과 접촉할 때 되살아난다. 용기는 가르쳐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염시켜야 한다. 사회는 상호 격려의 거대한 실험실이다. 각 구성원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용기를 줄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용기는 시련이 있을 때에만 발휘된다. 시련이 없다면 용기도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시련의 시기에 용기가 나오는 것은 절망하기보다 용감하게 맞설 때 고통이 훨씬 덜하기 때문일 것이다. 

할 말이 더 있다. 기쁨에 관해서다. 심각한 장애를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놀라운 기쁨. 우리가 버스 안에서 목격하는 건강한 사람들의 침울한 분위기와 대비되는 그 기쁨. 이를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나는 그들의 삶이 지속적인 용기, 즉 끊임없이 용기를 소모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용기는 많이 쓰면 쓸수록 많이 갖게 된다. 용기는 흐르는 물처럼 그들 마음에 스며들어 기쁨을 발산한다. 그것은 운명에 승리한 기쁨이다. 이 기쁨은 큰 업적을 달성한 사람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더욱이 심각한 신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단 하루의 승리가 아니라 매일의 승리다. 이 생생한 기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소유한 것에서라기보다는 투쟁하는 것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것은 전염되며 배가된다. 

‘선’ 그 자체는 그리 눈에 띄게 전염되지 않는다. 하지만 눈에 띄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특별히 용감한 순종이 전염되는 효과다. 특별히 역경 앞에서 용감한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우리 안에서 큰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내가 직접 이 진리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 옥스퍼드 그룹 운동은 용감한 순종의 한 모델로 인해 탄생했다. 어떤 기관의 회장이었던 프랭크 부크먼은 운영 위원회와 심각한 마찰을 빚고 사임했다. 그는 극도로 비통한 심정으로 작은 예배당에 들어갔다. 오랜 침묵 속에서 그는 위원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각 위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보내라는 명령이 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명령에 순종했다. 이 이야기는 옥스퍼드 대학교 학생들 사이에 삽시간에 퍼졌고 곧 이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하나씩 하나씩 용기를 되찾고, 자신의 삶을 정돈하면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이를 바로잡아 그리스도께 삶을 헌신하게 되었다. 그러자 기쁨이 터져 나왔다. 

이는 시련으로부터 솟아오를 수 있는 창조성에 대한 모범 사례다. 그 창조성의 봇물을 터뜨린 것은 프랭크 부크먼이 경험했던 시련 자체가 아니라, 시련에 대한 그의 용기 있는 반응이었다. 용기는 이처럼 전염된다. 마치 산사태가 난 것과 같아서, 일단 시작되면 급속도로 번진다. 옥스퍼드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각 나라로 퍼져 나갔고, 내게도 찾아왔다. 나의 한 환자로 인해 내 마음도 움직였던 것이다. 그의 신비로운 변화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의학의 차원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면증 환자들이 약물 없이 잠들었고, 대식증 환자들은 식욕을 조절할 수 있었으며, 고혈압, 류머티즘 환자들의 증세가 완화되고 월경 장애가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영적 교류가 나아가는 목표점이다. 나와 나의 많은 동료들은 이 방식에 뛰어들었다. 그간 한 번도 헤모글로빈 수치가 65퍼센트를 넘은 적이 없던 한 여성이 어느 날 80퍼센트 이상이 된 것이 발견되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더니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이 운동은 의사, 신학자, 정치가처럼 위신 때문에 정서적 열정에 쉽게 쏠리지 않는 사람들을 사로잡으며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이 특권층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로 인해 가난과 부끄러움에 시달리며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프리다 네프는 신앙의 힘으로 용기를 얻어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고, 무일푼으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젊은 여성들을 위한 숙박 시설을 개설하여 그들을 그녀가 경험한 놀라운 모험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역사를 통틀어 같은 현상이 반복되었다. 강력한 영적 운동을 태동시킨 것은 늘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한 사람의 용기 있는 순종이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아빌라의 성 테레사, 마르틴 루터, 존 웨슬리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 외에도 부처, 소크라테스, 간디의 용기가 미친 광대한 영향을 생각해 보라.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용기다. 

용기가 순환되는 보편적인 연결망이 있다면, 감정이 교류되는 연결망도 있다. 이 둘은 손을 맞잡고 함께 진행되며 인격적으로 접촉하기 위한 조건이다. 특히 삶의 어려움에 직면하여 갖는 용기와 인격적 접촉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강렬한 감정 교류의 순간이 없다면 효과적인 치료를 할 수 없다. 의사는 환자를 돕기 위해 이 감정의 부담을 용감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환자에게 용기라는 약을 투여해야 한다. 그러려면 공감적으로 경청하는 일에 수반되는 정서적 부담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 때 일종의 연속적 교류가 일어난다. 듣는 이에게 자기 감정의 짐을 지움으로 그 짐을 내려놓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특권은, 예수 그리스도와 매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우리 짐을 그분께 내려놓음으로써 이 연쇄 반응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 자신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하셨다. 

마지막으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고통이 정말로 생산적인 것인지 묻게 된다. 이미 고통 그 자체는 창조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고통 없이는 창조적인 사람이 되기 어렵다고 결론 내린 바 있다. 창조성의 개념은 성장과 발전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은 고통은 아니지만 고통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모든 상실과 고통은 창조성을 캐내기 위한 특별한 기회다. 우리에게 남겨진 몫은 그것이 왜 그런 것인지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이다.

8장 정보 이론에서 말하는 잡음  
“적으로 알았던 것이 갑자기 동지와 친구로 보일 수 있다.”

어떤 책을 읽는 도중 나는 갑자기 흥분의 전율을 느꼈다. 이 문제를 새롭게 조명해 주는 빛을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이 감정을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다. 그 책은 프랑스 의사이자 생물 물리학 교수인 앙리 아틀랑의 책 『수정과 연기 사이에서: 생물체의 조직에 관한 소론』이었다. 앙리 아틀랑의 주요 관심사는 생명 조직의 열쇠, 즉 생명의 비밀을 발견하는 것인데, 이것은 흥미로운 모험이었다. 나는 서둘러 이 과학자의 더 포괄적인 책 『생명 조직과 정보 이론』을 읽었다. 그의 모든 방정식을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내 관심사는 생명 조직의 신비를 벗겨 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상실에서 나오는 창조성 문제를 밝히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잡음(noise)'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즉시 알아차렸다. 아틀랑은 “정보 전달 과정에서 다양한 인자에 의해 오류가 발생하며 이 인자들은 우발적으로 개입한다. 따라서 이것들은 ‘잡음 인자’라고 불린다.”라고 쓰고 있다.

데이터 처리 작업과 원거리 통신 기술에 관한 쉐넌의 정보 이론에 의하면 잡음이란 전화를 할 때 전화선 상태에 결함이 있어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에 비유하거나 기계공이 모터나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때 나는 지극히 작은 소리를 비유하는 것으로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소리가 난다면 문제가 있다는 뜻이며 그 소리로 문제를 진단할 수 있다. 이는 의사가 환자의 심장과 폐에서 나는 소리로 진단을 내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 정보 이론이 생물학에 적용되면서 우리는 놀라운 전환점에 이르게 된다. 적으로 알았던 것이 갑자기 동지와 친구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척 해로운 요인이라고 여겼던 잡음이 ‘이로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제 이 역설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종의 진화 문제가 있다. 드 브리스가 주장하는 돌연변이는 잡음에 대한 아틀랑의 정의, 즉 ‘암호의 재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발적 오류’에 꼭 들어맞는다. 따라서 환상적 진보를 보이는 종의 진화 전체를 설명하는 필요 충분적인 열쇠는 잡음, 즉 DNA 암호 복제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우발적 오류다. 그러니 암호의 ‘이로운 효과’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결코 그뿐이 아니다. 이러한 복잡성으로 나아가는 진보, 즉 해부학적, 생리학적, 심리학적 분화 과정 속에서의 모든 진보가 바로 이 잡음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그러한 분화 과정은 생명체와 그 조직, 요컨대 그 질서의 고유한 특질이다. 분명 이것은 가설의 영역에 속하며 검증받기 위해서는 많은 작업이 필요하지만, 내가 이러한 검토를 통해 이끌어낸 것은 선과 악, 나쁜 행위와 선한 행위, 시련과 창조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다. 잡음은 오류이며 악이다. 그것은 정보의 충실한 전달을 방해하며 물리쳐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잡음은 정보 전달 과정에 새로운 요소를 끌어들이고 그리하여 정보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이틀랑은 이렇게 썼다. “떼어 놓고 보면 정보의 파괴처럼 보이는 것이 포괄적인 안목에서는 정보의 창출로 여겨질 수 있다. 이는 가능한 일이며 모순이 아니다.”

데이터 처리론에서 말하는 잡음과 내가 에이날 박사에게서 인용한 상실의 개념에 놀라운 유사성이 있지 않은가? 잡음은 상실의 한 형태인 것이다! 잡음은 정보 복제 과정에서 생긴 오류이고 정보의 정확성이 상실된 것으로, 정보에 흠을 낸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다. 잡음은 정보 전달을 방해하는 것으로 사물의 질서나 정상적인 진행 과정을 어지럽히는데, 내가 말한 모든 종류의 상실이 바로 이런 일을 한다. 죽음, 사고, 질병, 실패, 사랑의 슬픔, 신체 장애, 노화가 찾아오면 갑자기 정상적으로 살아 갈 수 없게 된다. 이런 상실은 잡음이 정보를 파괴할 때처럼 우리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아틀랑의 말처럼, “만약에 이러한 우발적 교란의 영향을 받아도 (유기체의) 시스템이 파괴되거나 흐트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반응해서 복잡성을 증가시키고 계속 작동한다면, 우리는 이 시스템이 자기 조직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자기 조직화의 속성은 조직을 생산하기 위해 ‘잡음’, 즉 우발적 교란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의 가능성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내가 앞서 말했던 상실의 딜레마 -파괴인가, 창조인가- 의 두 가지 반응이 다시 등장한다. 창조를 일으키는 것은 잡음 자체가 아니라 잡음에 대한 주체의 반응이다. 생물학자들의 연구가 좋은 쪽과 나쁜 쪽 사이의 균형을 깨뜨리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줄 수 있다면 분명 우리에게 귀중한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 심리치료사들도 정보를 교란시키는 우발적 인자인 잡음, 이 훼방꾼을 잘 알며 그것을 ‘착오’라 부른다. 프로이트의 천재성은 착오와 모든 종류의 실수 행위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데서 드러난다. 누군가 어떤 말을 할 때 두 가지 정보가 중첩된다. 하나는 명시적인 것으로 화자가 전달하기 원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무의식적인 것으로 완전히 다른 것을 표현한다. 정보는 방해받고 축소되지만, 착오가 그에 추가되어 전달되는 정보의 총량은 늘어난다. 모든 심리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이 ‘실수 행위’ 이론에 동의한다. 융과의 논쟁에서 프로이트는 목적 개념을 부정했지만, 그것을 과학에 다시 끌어들였다. 유전학에서의 잡음 이론도 목적 개념을 함축한다. 잡음이 일종의 착오라면 그것은 의미와 목적을 가지기 때문이다. 아틀랑도 단호하게 말한다. “어떤 단일한 사건이 일어나 시스템의 어느 경로에서 의사소통을 방해하면 거기서 의미가 탄생한다.” 

다행스럽게도 착오는 우리가 감지할 수 없었던 문제를 드러낸다. 이러한 과정은 꿈을 분석함으로써 드러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을 시작케 하는 것은 어떤 착오일 것이다. 나는 아틀랑이 보여주듯,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잡음을 사용하고 그 손실을 만회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는 편이다.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악을 이용하는 것이 한 예일 것이다.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가장 불의한 악이 그 곳에서 가장 큰 은혜를 확증하지 않았는가? 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는 신자들을 치료하면서,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완전무결하게 순종해야만 그 계획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약간의 잘못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윤리적 강박관념에 가까웠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 잘못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마음이 편해지는지 모른다.


9장 일상성과 창조성  
“시련만이 신체적, 정신적 습관의 굳은 껍질을 깨뜨린다.”

일상성이 반복되면, 바로 그 때문에 즉각 창조성을 잃게 된다. 일상성은 생명의 열매이나, 동시에 그것은 생명체의 독특함을 빼앗아 가고 생명체를 화석화한다. 서구 기술 문명은 언뜻 보면 창조성을 키워 주는 것 같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우리의 삶은 ‘지하철-일-잠’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독하게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과거의 장인 사회는 한결같이 개인의 창조성을 요구했으나 지금은 모든 것이 이윤과 물질적 번영에 희생되었다. 여가 시간마저도 광고가 원격 조정하고 상업 회사들이 이용하는 대중 운동이 되었다. 이러한 보편적 조건에 갇혀,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굴복한다. 그들은 자신이 일상성의 그물에 갇히도록 내버려두고,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 있던 자연스러운 창조성을 잃어버린다. 

호두까개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일상성은 무척 제한된 공간 안에 우리를 교묘하게 가두어 두는데, 호두 껍질은 점점 단단해져 가는 피난처를 나타낸다. 껍질은 우리의 창조적 감수성이라는 부드럽고 맛있는 열매를 안전하게 담고 있다. 껍질을 깨면 그 안에서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일상성 안에 구체화되어 굳어지는 인생의 정상적 과정을 교란시키는 모든 상실을 호두까개에 비유할 수 있다. 호두 껍질을 부수는 것은 갑자기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유감스러운 사건 같은 가혹한 재난들이다. 특별히 고통스러운 시련을 당할 때면 누구나 자기 삶이 작은 호두 껍질처럼 깨졌다고 느낄 것이다. 이 때 단단한 껍질은 유전 암호, 심리적 콤플렉스, 조건 반사, 습관, 편견, 반복적 행동처럼 우리를 가두고 있는 엄격하고 고정된 틀 전부를 의미한다. 

그러나 무언가가 깨진다. 결코 예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정상적 삶의 행렬 안에서 잊어버리곤 했던 실존의 의미, 병이나 죽음 같은 고통의 의미를 스스로 묻기 시작한다.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시도해 보아야 하고, 조금씩 하나님을 찾아가며 성경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미지의 하나님’, 즉 정의 내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시련과 상실을 겪고 나서 창조성이 솟아나면 통찰력이 깊어진다. 창조성은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창조성을 타고났다는 의미다. 

물론 호두가 익어 땅에 떨어지면 저절로 깨져 부패하기도 한다. 이 죽음의 과정은 생명의 싹을 해방시켜 자라나게 해준다. 우리가 깊이 숙고해야 할 교훈이 여기에 있다. 의지적으로 단호하게 선택한 자발적인 상실도 창조성이 새롭게 전개되는 기회일 수 있다. 다른 것을 잡기 위해서는 이전 것을 놓아야 한다. 그것은 ‘공중그네타기’와 같다. 서커스에서 공중 그네를 타는 사람들은 다른 그네를 잡기 위해 잡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한다. 창조성이 우리 삶에 새로운 추진력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확실성이 없기에 시련의 순간에 이를 의심하기 쉽다.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모범 사례에 의해 소망이 더욱 일깨워질수록 이런 일이 발생하는 개연성은 높아질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인생의 모든 시련이 밭을 가는 것처럼 씨를 뿌릴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시련만이 신체적, 정신적 습관의 굳은 땅을 기경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속하는 진부한 삶의 굴레, 그것은 우리가 시련에 의해 강제로 멈추어야 할 때 실감하게 되는 실존의 진부함이다. 우리는 이제껏 존재보다 행위에, 성공과 이윤에, 지식과 소유에 몰두하는 강력한 사회적 게임 앞에 굴복했다. 그러나 이런 소란 속에는 영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창조성은 영감이다. 정말로 창조적이라면, 잠깐 멈추어 개인적으로 선택한 삶의 목표를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사람의 진정한 일은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껏 인격의 부드러움이 아니라 사물의 딱딱함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사물의 세계를 건축하여 고도로 발달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인격을 희생시켰다. 무소불위의 기계적 세계에서 인간은 비인격화되어 버렸다. 기계적이고 객관적이며 반복적인 것은 사물의 세계다. 창조성, 공상, 시심, 감성을 부여받은 것은 인격이다. 우리는 기술적 진보, 사물의 진보에 희망을 걸었는데 이 보잘것없는 것에는 진정한 희망이 없다. 르낭은 최근의 과학적 발견으로 머지않아 우주의 신비에 대한 모든 불확실성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으나, 그가 말하는 이 대단한 사건에도 희망이 없다. 희망은 인격, 예수님의 인격에 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더듬어 찾아갔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계신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분은 죽음 너머의 세상, 우리를 위해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신 처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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