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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나미	(2005-09-15 오전 11:39:47, 조회 : 1981)

출판사

황금가지

제목

파란 눈의 성직자들

/ 2004년 5월 / 235쪽 / 12,000원

▣ 저자 김나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는 성직자들과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구도자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1992년까지 오랜 기간 외국에서 생활했으며, 귀국 후에는 동국대학교 불교 대학원, 연세대학교 국제학 대학원과 철학과 박사 과정(불교 전공)을 마쳤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 하네』, 『환속』, 『그림으로 만나는 달마』, 『사람아 너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느냐』 등의 저서가 있으며, 현재 서울 한남동에서 요가 명상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 Short Summry
이 책은 한국에 들어와 숨은 곳에서 봉사하는 파란 눈의 신부님, 수녀님, 스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자신이 선택했지만 이국 만리에 와 주어진 환경에서 신의 부름이나 불가의 인연에 따라 충실한 모습을 보이는 파란 눈의 성직자들의 봉사와 기도의 현장을 그리고 있다. 이들에게는 ‘자신을 위한’이 아닌 ‘남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공통점이 있다.

구룡마을과 ‘위로의 샘터’에서 봉사하는 박호 신부님, 에이즈 퇴치에 온 힘을 쏟고 있는 노인조 수사님, 작은 일이라도 남을 위한 일만을 하며 이 나라, 그리고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시는 오딜 수녀님, 1970년대 초, 도시 빈민 운동을 시작하셨던 정일우 신부님, 1960~1970년대, 간호사로 들어와 결핵환자를 돌보셨던 에블린 수녀님, 독일 자신의 집을 포교당으로 바꿔 현지인들에게 불법의 지혜를 나누어 주는 스탑나우 교무님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 차례
들어가며
더 낮은 자리에서 사랑하십시오 - 박호 신부
당연하게 누리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 정일우 신부
이 세상에 쉬운 삶이 어디 있겠어요 - 에블린 수녀
서로 용서하십시오 - 노인조 수사
안락함보다는 마음의 충만함이 우선입니다 - 오딜 수녀
욕심은 그 정도로 끝내세요 - 원법우 스탑나우 교무
나오며

더 낮은 자리에서 사랑하십시오 - 박호 신부
역곡 전철역에서 내려 가톨릭 대학 방향으로 걷다 보면 빌라가 조밀하게 모인 곳에 지상 4층의 벽돌집이 자리하고 있다. 십자가도 안 걸려 있는 이곳에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나누고 사는 파란 눈의 성자들이 있다. 꼰솔라따 선교 수도회의 한국 지부장인 박호 신부님은 1954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던 중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꼰솔라따 수도회에 들어갔다. 본명은 ‘프란시스코 예수’로 보통 애칭으로 ‘파코’라고 부르는데 우리말로 발음이 비슷한 ‘박호’라는 한국 이름을 쓰고 있다. 1988년 1월 서울에 지부를 세웠고 인천 만석동 달동네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2002년부터는 양재동의 구룡 마을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선교사니까 우선 우리말을 잘 해야지요.”
신부님은 작년 첫 대화 때부터 “십팔 년째 살면서도 잘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말만 할래요.”라고 못을 박았다. 처음 서울에 와 매운 음식에는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우리말 공부는 정말 재미있었다고 한다. 신부님에게 우리말은 곧 한국어다. 신부님의 우리말 실력은 만남이 거듭될수록 일취월장하고 있다. 신부님이 이렇게 노력을 하는 데는 사연이 있었다. “어느 날 한 신자가 고해성사를 하러 왔어요, 난 보속을 주며 화살기도를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ㅎ' 발음이 안 돼요. 그래서 ’화‘ 발음이 ’자‘로 나와서 화살이 자살이 되었어요. 나중에 그 신자가 나보고 자살기도는 어떻게 하느냐고 하기에 많이도 웃었어요.” 그 뒤로 발음 실수에 대한 에피소드는 수없이 많아 한 시간이 넘게 배를 잡고 시원하게 웃고 또 웃어야 했다.

“넌 누구를 위하여 이곳에 들어왔느냐.”
신부님은 스페인 남부의 유명한 휴양지인 말라가 근처의 ‘에스테포나’라는 작은 마을에서 여섯 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전통적인 가톨릭 집안이었지만 종교에 있어서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단다. 신부님은 열두 살 때부터 미사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져 한때 성당을 멀리 한 냉담자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조카의 병을 계기로 하여 기도로 하느님을 찾게 되었다. “하느님, 조카를 살려주시면 평생 내 인생을 바쳐 사제의 길로 갈 것을 맹세합니다.”

기도의 힘인지 조카는 드디어 병석에서 일어났다. 그때 신부님은 문득 겁이 나서 다시 한 번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제가 했던 맹세를 취소합니다.” 맹세를 저버리고 친구들과 어울리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하던 중 주님께서 원하는 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삶을 맡기게 된다. 대학 졸업까지 기다리며 성소 피정을 통해 더욱 자신의 의지와 하느님의 부름 사이에서 고민하며 기도를 계속했다. 결국 ‘내 뜻대로’가 아닌 ‘그분의 뜻대로’ 완전히 맡기며 확실한 하느님의 부름을 확인하게 됐고 신부님은 주저 없이 꼰솔라따 수도회를 선택했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가 몰아쳤다. ‘그분 뜻대로’를 따랐지만 ‘내 뜻대로’가 신부님을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사제 서품을 받아야 하는 서원을 앞둔 시점에 하느님에게 매달리며 간절한 기도를 시작했다. “혹시 잘못된 선택은 아닌지, 부름이 확실한지 물으며 간절히 기도를 하던 바로 그때 ‘넌 누구를 위해 이곳에 들어왔느냐’라는 또렷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어요. 확신 없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 깊이 반성하게 되었지요.”

신부님이 신부로서, 또 선교사로서 삶을 충실하게 살 수 있는 또 하나의 힘은 바로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남을 위해 봉사할 때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말로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라.”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어 큰 힘이 되고 있다.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일’을 배우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가운데 신부님은 특히 세 가지를 강조했다. 공동체의 의미, 타 종교와의 대화를 통한 이해와 포용, 그리고 항상 낮은 곳에 임하리라는 마음이다. “각기 다른 사람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 땐 반드시 형제 같은 사랑이 필수예요. 여기 모인 형제들은 내가 선택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하지만 오로지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한뜻’으로 모여서 수도 공동체가 이루어졌지요.”

“같이 생활하는 게 항상 즐겁기만 하진 않으시지요?” “서로 문화가 다르고 자라난 환경과 배경, 성격이 다르다 보니 충돌이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결국 ‘형제 같은 사랑’ 하나로 융화됩니다. 형제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에요. 멀리 있는 사람보다 같이 사는 사람을 사랑하기가 어렵지요. 그러나 우리는 길을 찾아 함께 가는 사람들입니다. 모두 ‘함께할 것’을 결정했기 때문에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일’을 배우지요.”

신부님은 사랑의 깊은 의미를 성경 구절에서 인용하며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성경에도 있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 했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 남들도 우리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겠어요? 하느님의 사랑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공동체예요. 형제 없이는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눈앞의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말이 되나요? 이것이 바로 수도예요.”

“형제들이 있고 나눌 수 있는 곳이 바로 내 고향입니다.”
구룡 마을은 한국전쟁 직후의 풍경과 다를 것이 없었다. 쓰레기 산 옆에 서너 평 남짓한 작은 사무실을 두고 꼰솔라따의 신부님 두 명이 마을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 사무실 옆에 공부방을 열어 자원 봉사 선생님들과 같이 운영하고 있다. 영하의 추운 날이었는데 어디에도 온기가 없다. 방 안을 들여다보니 배관이 터져 모두 젖었다며 한겨울에 선풍기로 요와 이불을 말리고 있었다. 난 그만 선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어쩌면 저렇게 일할 수 있을까. 선교가 목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봉사라는 단어는 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헌신이었다.

“신부님,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는 거죠?” 낮은 곳에 임하는 마음을 알지만, 난 푸념 섞인 바보 같은 넋두리를 하고 말았다. “그곳도 사람들의 보금자리에요. 우리의 작은 손길이 가서 약간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또 우리의 발길이 가서 할 일이 있다면 어디든 가야지요.” “고향 떠나 이 땅에 오셔서 정말 수고가 많으세요.” 신부님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담고 살며시 입을 연다. “난 외국에서 산다는 생각이 전혀 없어요. 형제들이 있는 곳, 나눌 수 있는 곳이 바로 내 고향입니다.” 신부님을 보면서 온 정열을 쏟는 그 힘 뒤엔 분명 주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주님은 신부님의 등을 두드려 주고 계시리라.

“내 자신이 나약하기에 더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수도회 안이든 밖이든 신부님은 볼 때마다 항상 웃는 얼굴이어서 주위 사람의 기분까지 환하게 해 준다. 늘 사랑이 샘솟듯 넘쳐 누구나 반기고 누구에게나 웃어주시니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 같다. 대화의 막바지에 신부님은 너무나 사랑하고픈 지구촌 형제들에게 사랑의 전갈을 준다. “남의 눈을 신경 쓰지 말고 잠시 멈춰 내면의 소리를 들어 보세요. 종교에 상관없이 양심에 따라서 사는 삶 속에 행복이 있어요. 마음의 평화는 양심에 귀 기울일 때 찾아옵니다.” 신부님은 한 구절을 더 추가한다. “남 때문에 혹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 내면의 목소리, 즉 양심을 거스르며 사는 건 억지로 사는 게 아닐까요. 양심을 외면하면 공허함만 남습니다.” 씁쓸하게 건네는 신부님의 이 말을 또박또박 가슴에 새기며 일어섰다.

당연하게 누리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 정일우 신부
정일우 신부님이 현재 총책임을 맡고 있는 한 몸 공동체는 예수회 한국 지구, 천주교 도시 빈민 사목 위원회 소속으로 예수회 신부님, 수사님이 사회 사도직을 펼치기 위한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껴 자연스럽게 탄생한 공동체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정일우 신부님이 초대 원장을 맡았고 2002년부터 다시 신부님이 꾸려가고 있다. 현재는 열 명의 신부님이 각자 현장에서 뛰고 있다. 노동자 쉼터 마련, 이혼 가족 상담, 약물 중독 상담, 비행 청소년 지도, 내외국인 노동자의 인권 보호 등 각기 주어진 임무와 일터가 다르다.

정일우 신부님의 본명은 존 빈센트 데일리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1935년 일리노이 주의 파이로 태생이다. 신부님이 신부가 된 것은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 단지 ‘끌림’에 의해서였다며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수회 신학생과 수사님이 우리를 가르쳤는데 그들을 보면 얼굴에 행복이 넘쳤어요. 우리 학생들에게 그 행복을 나눠 줬는지 정말로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냈지요. 그래서 자연히 나도 그 길로 들어서게 된 거예요.”

“어렵게 한국 사람이 되었어요.”
신부님이 신학생 신분으로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1960년 9월 21일이었다. 1960년부터 1963년까지 서강대에서 철학과 영어를 가르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신학 공부를 마치고 1966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67년, 이번엔 신부님의 신분으로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얼마나 다시 밟고 싶었던 땅이었던가. 신부님을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은 바로 ‘정’이었다. “한국에 삼 년간 살아 보고 나니 미국이 답답했어요. 한국 땅이 그립고 한국 사람이 보고 싶어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 그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어요. 의문의 여지없이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어요.

신부님은 1997년 귀화하여 정일우란 이름을 갖게 된 대한민국 국민이다. 국적을 바꾸는 데에는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1969년부터 귀화 신청을 하고 싶었는데 처음엔 예수회에서 거절을 하더군요. 그 다음부터는 중앙정보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 또 불가능했어요. 불순한 사람으로 찍혀 계속 퇴짜를 맞다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1997년에야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어요.”

‘난 왜 입으로만 가르치나.’
서강대로 돌아와 강단에 섰다. 신약 입문과 철학 과목을 강의하며 교수로서, 신부로서 신분을 보장받고 혜택을 받으며 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그러나 문제는 신약 강의를 하면 할수록 ‘난 왜 입으로만 가르치나.’라는 회의가 드는 것이었다. 육 년간의 강의에서 나온 결론은 개념과 말로는 신약의 복음을 전달할 수 없으며 몸으로 직접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론이 나오기까지 뼈저리게 자신을 몰아쳤다 한다. 결국 신부님은 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됐고 서슴없이 청계천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너의 삶이 삶이냐.”
신부님이 빈민 운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73년, 청계천에서 빈민과 같이 살다 청계천 일대가 강제 철거되려 하자 그때부터 철거민들과 인생을 같이 하게 됐다. 당시 청계천 주민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신부님은 청계천이야말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확신했고 그들과 어울려 같이 살았다. “왜 같이 살기로 하셨어요? 반드시 거기서 살아야만 했나요?” “처음엔 한 달간이라고 못을 박고 도시 빈민 생활을 체험하고 싶었는데 그게 십팔 년이 되더군요. 그 안엔 정말 배울 게 많지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운 건 더 많아요. 청계천 주민들의 삶이 내 머리를 망치로 꽝 치며 ‘삶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깨우쳐 주었지요. 그들은 가난뱅이, 무식쟁이라 불릴지 몰라도 당당하게 ‘나는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청계천 철거민은 시흥의 공동체 마을인 ‘복음자리’로 옮겨 갔다. 신부님도 복음자리에 입주했다. 이후 양평동, 상계동으로 옮겨 더욱더 철거민들과 가까이 있게 됐다. 신부님은 철거민과 같이 한 헌신적인 삶으로 1986년 제정구 의원과 함께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덕에 지구촌이 이렇게 굴러갑니다.”
명동 성당의 보조 신부로 있으며 다음의 강제 철거 대상을 파악한 다음 또 철거촌으로 입주하길 되풀이했다. 그 사이 신부님은 철거에 관한 한 전문가가 되어 철거민들에게 ‘주택의 의미’에 대한 교육까지 할 수 있었다. 신부님은 도시 빈민의 입장에서 거침없이 고언을 한다. “소외된 계층인 도시 빈민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을 원할 뿐이에요. 그들은 아주 작은 것을 원해요. 부잣집이 팔십 평에 산다고 칩시다. 하지만 빈민은 단지 추위를 피하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작은 공간, 십여 평 정도면 만족해요.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을 원했는데 그것마저 무시되었지요.”

대한민국 도시 빈민을 대변해 신부님의 목소리에 더 큰 힘이 실린다.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세상이 와야 해요. 농부, 노동자, 도시 빈민 모두가 비주류이지만 그들에 의해 이 세상이 유지되고 있는 걸 아세요? 세계의 빈민들이 날을 잡아 일주일만 파업을 했으면 좋겠어요. 환경 미화원, 트럭 운전사, 배달원 등 소위 하층의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도시가 마비될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힘으로 이 지구가 굴러가고 도시가 제대로 기능을 하잖아요.”

“농부의 땀을 기억하십시오.”
상계동 철거촌을 마지막으로 하여 신부님은 1991년부터 사 년간 예수회 한국 교구의 부지구장을 지냈다. 그 후 1994년 충북 괴산으로 내려갔는데 이곳에는 유기농 채소를 공급하는 솔뫼 농장이 있고 그 안에 예수회의 누룩 공동체가 있다. 팔 년간 직접 농사를 지으며 이번엔 농민과 함께 살았다. 누룩 공동체는 신부님에게 자연의 힘을 배우게 해 준 곳이다.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농약을 많이 쓰던 농부 세 명의 손가락에 마비가 왔다. 농약을 뿌리면 곧 죽음을 뿌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신부님은 유기농 농사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다.

빈민을 잘 아는 신부님은 이번엔 농부로서 체험을 통해 농부의 마음을 전한다. “농부들은 빚만 떠안고 살아요. 가장 수고를 많이 하면서도 밑지는 장사를 해요. 농사를 잘 지어 추수를 해도 모든 이익은 중간 상인에게 갑니다. 농협의 이자가 얼마나 비싼지 아세요? 땀 흘려 수고해 이자라도 갚으면 운이 좋은 편이고 원금은 갚지도 못해요. 농부들이 일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이자 갚기도 빠듯해서 그래요. 빚에 시달리고 있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농부가 손을 놓으면 우리 밥상에 오를 것도 없어요. 누가 조금이라도 농부의 땀방울을 알아주기나 합니까?”

어디 그것뿐인가. 홍수, 가뭄, 태풍, 폭설 피해로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번엔 내가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한마디 건넸다. “밥 먹을 때만이라도 농부들의 땀을 기억해야겠어요. 식전 기도에 같이 기억하면 좋겠네요.” 이후부터 나는 평소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눈에 새로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따뜻한 잠자리를 고맙게 느끼기 시작했다.

“함께하는 삶 속에 복음이 있어요.”
신부님은 가난을 선택했다. 그것이 자신이 가장 떳떳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가난 속에 있는데 돈 벌기 바쁜 사람보다 더 바쁘다. 시간 뺏기가 죄송할 지경이다. “이젠 쉬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난 일복이 많아요. 예수회원의 은퇴는 관 속이에요. 내가 무엇을 했느냐 하면 바로 빈민들과 농민들과 같이 소주마시고 신나게 놀았을 뿐이에요. 했다면 나 좋아서 한 일이에요.” “하지만 신부님, 아무나 그렇게 살 수 있진 않아요.” “나야 처자식이 없으니 그렇게 살 수 있었지요. 하하하!” 소박하고 시원한 웃음소리가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 준다.

“도시 빈민은 인생의 박사지요. 책에서,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어도 아는 것이 대학 교수보다 더 많아요. 밑바닥 생활을 해 보지 않고는 평생 못 배우고 갑니다. 사실은 유식한 사람이 더 무식해요. 배운 사람은 의식, 예식, 형식에 얽매여 자유가 없어요. 유식하고 돈 많은 부자들에게 가식이 많아요. 없는 사람에겐 가면이나 꾸밈이 없지요. 가진 것이 없기에 과장도 포장도 없이 자신 있게 ‘나는 나’라고 할 수 있지요. 농부, 노동자, 빈민이야말로 진정 인간답고 자유로운 사람들이에요. 스스로 선택한 가난은 자유이자 해방입니다.” 신부님은 ‘힘 있는 자’와 ‘가진 자’에게 가면과 구민, 가식이 없는지 삶을 되돌아보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신부님은 철거민의 생활에서 배운 것이 인생에서 가장 값진 보물이라며 그때가 가장 좋았다고 얘기한다. 그 곳의 삶 자체가 신부님에게 큰 배움터였던 것이다. “난 그들만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들의 삶 속에 복음이 있었어요.”

아직도 손을 놓지 않고 움직이는 칠순의 신부님은 여전히 여섯 시 반에 일어나 묵상을 하고 여덟 시에 공동체 미사를 하고 또 공동체를 진두지휘하는 일과에 들어간다. 신부님의 표현대로라면 아주 ‘신나게’ 한다. 신부님의 아직도 식을 줄 모르는 정열, 그 힘은 어디서 나올까. 집 없어 가난하고 철거민이라는 딱지가 붙어 소외된 사람들에게 신부님은 그들 세상의 소금이자 누룩이자 큰 빛이 되어 주었다. 파란 눈을 가졌지만 백 퍼센트 한국 사람인 이 성자를 난 ‘멋진 신부님’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 쉬운 삶이 어디 있겠어요 - 에블린 수녀(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
수녀원은 돈암동 성당과 하나로 통신 건물 사이에 있다. 선교 수녀원은 등 따습고 배부른 생각은 하지도 않는 곳이다. 이곳에 머무는 시간은 수녀님들의 검소함을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는 주님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삶을 같이 하기 위해 세상 어느 곳이든 갈 준비가 된 국제 선교 수도 공동체이다.

한국의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는 1955년 광주 교구의 헤럴드 대주교의 초대로 일곱 명의 의료진을 보냄으로써 처음 도움의 손길을 보내게 되었다. 수녀님들이 목포에 도착했고 목포 골롬반 의원은 네 명의 간호사와 의사 수녀님에 의해 1955년 결핵의원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뒤이어 한국에 도착한 수녀님들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 삼척, 춘천, 속초, 제주까지 가게 되었다.

의료 사업으로 시작한 복지는 장애인 복지, 노인 복지, 선교 수녀 파견으로 확장되어 갔다. 수녀회의 할 일은 세분화되고 다양해지면서 매춘 여성을 위한 쉼터, 알코올 중독자 쉼터, 착취당하는 외국인 여성 노동자의 쉼터, 미혼모 쉼터, 에이즈 감염 환자의 쉼터를 열었다. 춘천 골롬반 의원은 최근 병 말기의 노인 환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시설을 열어 또 하나의 열매를 맺었다.

에블린 수녀님은 1965년, 한국으로 파견된 간호사 수녀님이다. 수녀님은 올해로 예순아홉이다. 1935년, 아일랜드의 해안가 마을인 골웨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에블린 메니언, 한국 이름은 명지은이다. 한국생활이 벌써 삼십팔 년, 사십 년 가까이 봉사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수녀님 자신은 봉사라는 단어를 극히 꺼린다. ‘더불어 사는 삶’에는 굳이 나눔이나 봉사라는 단어가 필요치 않다는 의미이다.

“누워 있는 한 사람을 통해 서 있는 이웃 사람들을 전부 만났어요.”
수녀님은 1965년, 첫 임무를 삼척의원에서 시작했다. 슬프고도 기쁜 추억을 남기고 삼척 의원은 사라지고 수녀님의 다음 일터는 서울이 되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상계동 빈민촌에 들어가 간호사로 동네 환자 방문을 다녔다. 상계동 시절 이야기가 나오자 수녀님 얼굴이 환해진다. “추석과 구정이 되면 나도 같이 한 자리에 모여 송편을 빚고 윷놀이를 하고 그랬어요. 상계동에서 비로소 한국 풍습을 조금씩 익히기 시작했어요.” 상계동 주민 대부분이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고향을 못 찾으니 자연히 이웃 사람들과 서로 그 설움과 향수를 달랬다.

빈민촌엔 항상 작지만 큰 여운을 남기는 슬픔이 같이 있었다. “상계동 들어가서 며칠 후, 건축 현장에서 일하던 일꾼 한 사람이 사다리에서 떨어져 목 이하로 전신마비가 되었어요. 내가 그 환자를 방문했는데 그 사람 주변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거예요. 누워 있는 한 사람을 통해 서 있는 이웃 사람들을 전부 만났지요. 그분 덕분에 상계동 사람들을 모두 한 자리에서 만나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지요.” 이 말이 새삼 귓전에 맴돈다. 누워 있는 사람은 누운 상태로 그렇게 또 할 일이 주어지나 보다.

“고향에 가고 싶어도 못 가시기에 할머니들에게 더 정성을 쏟을 수 있었지요.”
속초에 ‘파티마의 집’이라는 양로원이 문을 열자 수녀님은 속초로 이동했다. 이곳 할머니들은 대부분 이북에 고향을 두고 홀로 내려온 실향민으로 가난과 외로움에 젖은 분들이었다. 할머니들과 살았던 이야기를 들려 달라하자 이번엔 함박웃음부터 나온다. “텔레비전에서 남북의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장면이 나오면 양로원은 울음바다가 되곤 했지요. 할머니들이 울면 나도 덩달아 눈물이 쏟아져요. 고향에 가고 싶어도 못 가시기에 할머니들에게 더 정성을 쏟을 수 있었지요. 지내다 보면 할머니들 사이에 자주 싸움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이상한 건 싸우고 나면 반드시 한쪽에서 먼저 나서 금방 화해를 한다는 거였어요. 싸움은 할머니들이 타향살이의 설움도 달래고 실향민의 한을 풀기도 하는 방법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 수 있었지요. 정이 푹 들어 아름다운 십이 년을 보냈지요.”

“할머니들과 같이 사는 건 좋았는데 임종을 지킬 때 가장 힘들었어요. 하지만 돌아가시기 전 꿈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분을 보면 임종을 지키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아요.” 갑자기 수녀님 표정이 굳어진다. “생전 누구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안 하시던 할머니가 있었어요. 밥을 주면 ‘맛있다’라고 하는 게 유일한 인사였어요. 그런데 그 할머니가 임종을 가까이 두고 있을 즈음 나에게 가슴 아픈 말을 하더군요. ‘난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어. 이 세상 아무도 날 사랑해 주지 않았어.’라고. 오래전부터 자신은 버림받은 존재라고 생각해 와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던 거예요. 그 할머님 돌아가실 때가...” 수녀님 눈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마지막까지 한을 품고 갔기에 잘 보내드리지 못한 것 같아 수녀님은 몸이 저려왔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마음으로 스스로 위로했다 한다.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보다 더 잘 나눠요.”
봄날의 주말, 축성식을 앞둔 춘천 성 골롬반의 집을 찾았다. 성 골롬반의 집은 생각보다는 크지만 아담했다. 노라 수녀님은 거구에 여장부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가장 세심한 손길이 필요한 불치병 말기의 노인 환자 전문 호스피스 간호사이기도 하다. 노라 수녀님은 한국 도착 삼 세대로 목포 병원을 거쳐 춘천으로 이동하여 1989년부터 성 골롬반 의원의 가정 방문 호스피스과를 맡은 간호사 수녀님이다. “말기 환자가 죽음을 앞두면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정신적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절망하지요. 마지막 여정을 같이 하며 절망을 나눌 때 환자의 얼굴이 평온해져요.”

1998년에 노라 수녀님에게 더 큰 일을 하라는 뜻에서인지 하느님이 독지가를 보내주셨다. 수녀님과 가정방문을 같이 하던 자원봉사자가 선뜻 땅 칠천 평을 기증했다. 당시 이 땅은 춘천시에 편입되어 값이 오르던 땅이자 기증자가 자식에게 유산으로 주려던 것이었다. 대대로 일궈 온 과수원 농사로 살아온 분이고 경제적으로 형편이 썩 좋은 사람은 아니었는데도 선뜻 내주며 한 가지 당부를 했다고 한다. 기증자를 절대로 밝히지 말라는 당부에 수녀님은 계속 익명을 지켜 왔다. 기증자에 대한 고마움을 실었는지 수녀님 눈이 커지며 작지만 의미가 큰 말을 준다.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보다 더 잘 나눠요.” 수녀님이 이십 년간의 한국 경험에서 나온 한마디였다.

“이젠 한국의 선교 수녀님이 외방으로 나갈 때지요.”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는 내국인 선교 수녀를 교육하여 외지로 내보내는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까지 남미, 중국, 동남아 등지에 나가 활동하는 수녀님이 모두 여덟 명이며, 선교를 떠나기 위해 준비 과정을 거치고 있는 수녀님의 숫자는 계속 늘고 있다. 수녀님에게 소망이 있다. 그 소망을 “이젠 한국 선교 수녀님이 외방으로 나갈 때지요.”라는 말에 담아 전한다. 자질이 풍부한 한국 여성들이 세계로 나가 필요한 자리, 있어야 할 자리에 가 주었으면 한다. 자신이 한 것처럼 후배 여성들이 좀 더 많이 나서 주길 고대한다.

“이 세상에서 쉬운 삶이 어디 있겠어요?”
미사가 끝나고 수녀님과 거실에 마주 앉았다. 환담을 나누다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두 가지 질문이 나도 모르게 나온다. “수녀님은 예쁜 걸 보면 갖고 싶은 생각이 드나요?” “그럼요. 그러나 난 저걸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럼 돼요.” 수녀님의 대답은 매우 솔직하다. 나도 한번 해보기로 했고 ‘난 저걸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다시 태어난다는 가정 하에 또 한 번의 삶이 주어진다면 다시 수녀가 되겠냐고 묻자 의외의 답을 준다. “시집을 가서 아이를 갖고 가정을 꾸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 쉬운 삶이 어디 있겠어요?” 무척 의미심장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다. 난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 전체 수녀님들을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 백의의 천사들이라 부른다.

서로 용서하십시오 - 노인조 수사(예수 고난회)
예수 고난회 신학원의 원장인 노인조 수사님을 만나면 웃을 일이 많다. 수사님에겐 권위 의식이나 딱딱함이 없다. 마당에 들어서자 수사님이 아주 흡족한 얼굴로 얼마 전 가족이 된 강아지 세 마리에게 ‘가’, ‘나’, ‘다’라는 이름을 붙여 모두 ‘캐나다’ 사람으로 만들었다며 손을 벌려 반겨 준다. 남자들만 사는 금녀의 집이지만 푸근한 수사님과 그곳의 유쾌한 분위기에 부담 없이 찾는다. 이곳은 세상의 걱정에서 잠시 벗어난 공간 같다.

“단순함이 좋아서요.”
작년 성탄절이 다가올 무렵, 신학원을 찾았다. 가지고 간 선물꾸러기를 내밀자 수사님은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뜯은 후 접어서 챙겨 둔다. 다시 필요할 때 포장지로 쓰려는 마음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신학원 건물 내부 온도는 겨울 내내 18도를 넘지 않았다. “참 검소하게 사세요.”하고 마음에 담았던 말을 꺼내자 “단순함이 좋아서요.”라고 한다. 복잡하게만 사는 우리에게 ‘단순함’처럼 필요한 것이 또 있을까. 수사님 방에는 작은 붙박이 장, 침대, 테이블, 그 위에 성경책 한 권과 성모 마리아 상이 전부이다. 많이 가지지 않은 단순함이 새롭다.

아무리 무소유를 말한다 해도 지키기 쉽지 않고, 갖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탈도 많은 이 세상에 노인조 수사님은 ‘소유냐 삶이냐’에서 소유 대신 풍성한 삶을 택한 사람이다. 무소유에 가깝지만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처럼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수사님은 예수의 고난을 생각함으로써 풍성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예수 고난회는 ‘청빈, 기도, 참회, 고독, 예수 고난 기억’이라는 5대의 영성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면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다 한다. 이곳에서는 신이 사람에게 보여 준 지고한 사랑의 표현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여 나눔으로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 고난회의 나눔은 가톨릭 액션 단체 지원과 사회 복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늘 수도자로 살고 싶었어요.”
노인조 수사님의 본명은 로렌스 핀으로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태어났다. 수사님은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꾸만 먼 무언가를 동경하는 소년이었다. 그 소년에게 하느님이 보내시기라도 한 것처럼 한 수녀님이 나타났다. 수사님은 수녀님의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에 영향을 받아 자신도 언젠가 틀림없이 그렇게 되리라 결심을 굳혔고 1971년, 드디어 예수 고난회에서 평생 수사로서 서원을 했다. 1975년 첫 파견지로 한국에 왔다가 로마에서 봉직한 후 다시 돌아와 한국 생활 이십오 년을 맞고 있다.

수사님은 한국 생활을 전남 광주에 있는 ‘명상의 집’에서 시작했다. 그 후 광주 가톨릭 대학교에서 교리 신학원 양성자 지도를 했고 우이동 ‘명상의 집’을 거쳐 현재 예수 고난회 신학원 원장으로 있다. 수사님에게 왜 신부가 아니라 수사가 되었냐고 물었을 때 수사님은 “난 수도자로 살고 싶었어요.”라고 했다. 수사님은 평생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에이즈 퇴치와 예방 활동이다. 수사님은 1998년부터 한국 가톨릭 에이즈 협의회의 모든 활동을 주도하며 에이즈 환자가 있는 병원과 쉼터, 환자의 임종 현장에서 봉사하고 있다.

“고난 속에도 기쁨은 있어요.”
수사님은 하느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봉사하는 기쁨을 꿈꾸며 서원을 했고 서원했던 대로 자연스럽게 수도자의 길로 발을 내딛게 되었다. “수사님 어떻게 오랜 세월 동안 서원하신대로 지켜 올 수 있나요?”하고 묻자 수사님이 오히려 나에게 되묻는다. “사람이 어디서 기쁨을 얻겠어요. 우리에게 복음 자리가 되는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한없는 기쁨을 발견하니 나누지 않고 어찌 살겠어요? 고난 속에도 기쁨은 있어요.”

수사님은 1975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뭐가 그리 신기한지 한국을 통째로 알고 싶었고 또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문화의 차이를 심하게 느끼게 되어 백 퍼센트 한국 사람으로 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다. 수사님도 초기에는 한국 생활을 하는 데 한국어 실력이 모자라 힘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글을 완전히 깨쳤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왔다. 화가 머리끝가지 났을 때, 입에서 욕이 나올 즈음 우리말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난 이제 됐다.’라는 자신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우리말로 농담도 쉽게 나오더란다.

“항상 처음과 같은 마음을 잃지 마세요.”
성직자를 수없이 만나 보았지만 최근 들어 실망을 주는 분들을 많이 만났다. 이러던 참에 수사님과 같은 분에게 묻고 답을 얻고 싶은 것이 있다. “수사님, 한 켠에선 성직자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들려요. 취재를 하다 보니 그 비난이 조금은 사실로 확인되고 있어요.” 수사님이 가장 간단하게 그리고 정확히 나의 고심에 대한 답을 준다. “성직자는 하느님도 부처님도 아니에요. 모두 인간이지요. 같은 인간에게 판단의 기준을 높여 기대를 하지만 성직자는 남다른 길을 택했다는 그 점만 다를 뿐 무엇이 다를까요? 성직자들은 서원대로 살 수 없을 때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성직자가 일만 하며 살다 보면 자칫 기쁨을 잃을 수가 있어요. 보람이 없어도 좋아요. 있는 곳에서 꾸준히 하느님과의 유대관계 속에서 기쁨을 느끼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어야 해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기쁨 속에 있어야 해요. 항상 처음과 같은 마음, 초심을 잃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네요.”

“서로 용서하면 안 될까요?”
수사님은 에이즈 환자 임종 시 염하는 일과 시신 처리까지 도맡아하고 있다. “에이즈 환자는 죄인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 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니 서로 용서하면 안 될까요. 용서를 안 하는 건 인간이 아니에요. 신이 우리를 정말 사람다운 사람 되게 하려고 이런 병을 주신 게 아닌가해요. 난 에이즈 환자를 통해 사랑과 자비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배웠어요.” 수사님의 표정이 안타까움으로 변하고 목소리는 애타게 들린다. 가장 냉대 받는 병자들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배우라고 수사님은 강조한다. 최악의 병에 걸린 사람에게 최고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는 더욱 소중한 것이기에 손길을 뻗치는 사람에게도 인간으로서 거듭날 수 있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건 하느님의 명령이에요.”
수사님이 자주 방문하는 병원이 있다. 하월곡동 고가 밑 성가 복지 병원. 성가소비녀회 수녀원에서 노숙자 환자를 위해 무료로 운영하는 병원이다. 이 병원 8층, 죽음을 앞둔 중환자 호스피스 병동에 에이즈 환자가 격리되어 있다. 에이즈 담당 수녀님인 고 수녀님이 나를 맞아주셨다. 항상 힘들어 보이는 현장을 가 보면 그곳에 반드시 수녀님이 있다. 난 이런 때마다 또 한 번 예수의 큰 사랑을 실감한다. 얼마 전 또 한 사람의 에이즈 환자가 저세상으로 돌아갔다. 모두가 꺼리는 궂은일을 마다 않고 움직이는 수사님을 보며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에 이런 분이 있어 세상이 밝다는 확신이 들었다.

“수사님 그렇게 큰 사랑은 어디서 그렇게 샘물처럼 나오는 건가요?” 수사님의 대답이 예상외이다. 아주 짤막하게 대답하여 내 질문을 무색케 한다. “이건 하느님의 명령이에요.” 잠시 침묵이 흐른다. “언제까지 에이즈를 위해 힘쓰실 건가요?” 이 질문에 수사님만의 특유한 유머가 나왔다. “그건 귀신도 모르는 일 아닌가요?” 다시 소년이 된다면 또 수사의 길을 가겠냐고 하자 그것 역시 귀신도 모르는 일이라며 웃는다. “귀신도 모르지만 내가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기쁘게 살았다는 점이에요. 그러나 다시 젊어질 수 있다면 더 재밌게, 더 기쁘게 살겠어요.”

안락함보다는 마음의 충만함이 우선입니다 - 오딜 수녀(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의 오딜 수녀님, 기도를 하면 수녀님 같은 모습이 될까 하여 저절로 기도하게 만드는 분이다. 수녀님의 이름은 마리 오딜 메가, 1931년 생으로 올해 일흔 셋이다. 15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체구도 아담하다. 단아하고 청초하게 곱게 나이 드신 모습이 언제 봐도 동양적인 자태를 지닌 파란 눈의 천사다.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는 1985년 7월, 일본 지부에서 오딜 수녀님을 서울에 파견했다. 수녀님은 오십이 넘은 몸으로 서울에서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를 개척했다. 기반을 닦고 영성 지도를 도맡아하며 1989년엔 환갑이 다 된 나이에 삼 년에 걸쳐 부천 수녀원 건물을 완공했다.

“가난하지만 행복합니다.”
수녀님들과 가깝게 지내던 대학 시절,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놀라운 발견을 계기로 수녀원으로 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숙사에 살 때 수녀님들을 보면 항상 검소하고 청빈했어요. 그 삶에 반하기도 했지만 수녀가 될 생각은 없었지요. 어느 여름날, 기숙사에서 바캉스를 갔는데 수녀님들이 아주 초췌한 아이들을 여럿 데리고 왔어요. 모두 가난한 아이들이었는데 해맑은 아이들의 활짝 웃는 모습에 내가 홀딱 반하고 말았지요. 장난감이 없어도, 배불리 못 먹어도 너무나 만족한 모습에 ‘가난한데도 저렇게 행복할 수 있구나!’하고 감탄했어요. 그러면서 내린 결론이 ‘물질이 전부가 아니구나!’였지요.” 순박한 아이들의 모습에 그들과 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수녀가 되고 싶어졌다고 한다. 1952년, 일년 간 피정을 떠났다. 그때 영신 수련 중에 ‘하느님은 나를 부르신다’는 확실한 메시지를 받았다. 그로부터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메시지는 여전히 생생하다.

“어떻게 하면 서로 화해할 수 있을까.”
수녀님이 십삼 년의 일본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나온 계기가 특이하다. “제가 일본에 있으면서 한일관계를 보면 늘 서로 불편한 사이더라고요. 그때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서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기로 한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일본과 한국이 서로 화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일본이 한국에 속죄할 수 있을까’라는 기도를 드리며 서울에 들어왔어요.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수녀님은 그 거리를 좁히려 애쓰는 분이다.

오딜 수녀님이 한국 진출의 기반을 닦아 와 수녀회는 오늘에 이르렀다. 수녀님은 여전히 한일관계, 그리고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수녀님의 기도 가운데 ‘한국을 위한 특별 기도’의 주제는 그때도 지금도 변함이 없다. ‘속죄와 화해’라는 주제의 기도가 변함없이 계속되는 가운데 한일관계에서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마찰, 교과서 왜곡 문제, 총리의 신사 참배, 독도 문제 등과 관련된 기도가 모두 수녀님의 기도 안에 자리한다. 지금은 종군위안부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자 매달 일본 대사관 앞에서 벌어지는 종군 위안부 보상 시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선 자리가 올라갈수록 몸은 낮아져야 해요.”
언젠가 수녀님에게 물은 적이 있다. 한국을 떠나면 무엇이 가장 그립겠냐 하자 수녀님 입에서는 연탄이 나왔다. 수녀님은 어린아이처럼 말도 잘하고 항상 빙그레하는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다. 살면서 화를 낸 적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다. 오딜 수녀님은 다른 수녀님을 대할 때와 느낌이 또 달랐다. “수녀님은 다른 수녀님처럼 어렵지 않아서 좋아요.” “선 자리가 올라갈수록 몸은 낮아져야 해요. 내가 윗사람으로 대접을 받기 전에 아랫사람에게 먼저 낮춰야지요.” 낮은 곳에 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리라. 수녀님의 얼굴만 봐도 신난다는 나의 말에 수녀님은 ‘낮춤’을 또 한 번 강조한다. 난 충만이 뭔지 몰랐다. 수녀님을 통해 충만이 어떤 모습인지 배울 수 있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나 편안하게’부터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에게 낮춤을 권하고 싶다.

“제 마음을 넓혀 주십시오.”
“기도를 안 하실 때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계신가요?” “변함없이 하던 일을 계속 하지요. 동네에 누워 지내는 사람들 방문하고 기도하고 영성 지도, 평신도 지도, 본당 사목을 해요. 가끔은 텔레비전 연속극도 보고요. 이따금 프랑스 치즈가 먹고 싶기도 하지만 기도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요.”

수녀님에게는 특별 기도가 많다. 나라에 일이 생기면 기도 시간이 길어진다. 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묵주 기도를 바치고 아픈 사람들을 찾아 또 기도로 위로해 준다. 수녀님의 생활은 하루하루, 매순간, 앉은 자리, 선 자리가 모두 기도로 시작되고 마감된다. “요즘은 무슨 특별한 기도를 하고 계시나요?” “요즘은 주님께 ‘제 마음을 넓혀 주세요.’라고 기도하지요. 나와 그리스도는 사랑하는 관계이고 난 하느님의 딸이니 존재의 작음을 잊고 모두를, 온 세상을, 다 끌어안을 수 있었으면 해요. ‘하느님, 하찮은 걱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시고 나의 가난한 영혼 안에 당신 사랑의 힘으로 온 세상을 안겨 주세요.’라고 기도해요. 나의 소명은 세상을 위해, 아시아를 위해, 그 가운데 한국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라는 것을 기도 중에 자주 확인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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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의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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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인생으로 詩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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