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
벧전4:7-11,이성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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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우리나라에서
1974년에 상영된 적이 있는 『빠삐용』이란 영화는 살인 누명을 쓰고서 종신형을 받아 남미 프랑스령의 악명 높은 기아나 형무소에서 혹심한 더위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누명을 벗기 위해 탈옥을 시도한 앙리 샤리에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빠삐용’이란 가슴에 ‘나비’(파피용)
문신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인데, 빠삐용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참혹하고 무서운 감옥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탈출에 성공하여 표류하다, 남아메리카에 이르러 자유인으로 여생을 보냅니다.
하루는 그가 감옥에서 밤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재판관들이 빠삐용을 둘러싸고 “너는 죄인이다”라고 집중 공격을 했습니다.
빠삐용은 자신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온 것이지, 죄가 있어 온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때 재판관이 “너는 인생을 낭비한 죄를 지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인생을 낭비하는 죄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흔한 죄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의 몫으로 주어지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이
세월을 낭비하는 것이며, 인생을 낭비하는 죄인 것입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져 있지만, 그 시간을 보람 있게
활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치도 없이 허송세월로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헬라어에 ‘시간’을 표현하는 말 중에
‘카이로스’(kairov")라는 말이 있는데, ‘질적인 시간’을 의미합니다. 시간에는 양적인 시간과 질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양적인 시간이
“얼마나 살았느냐”의 문제라면, 질적인 시간은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살았느냐”는 양적인
시간보다 “어떻게 살았느냐”는 질적인 시간입니다. 그리고 질적인 시간에 비해 양적인 시간의 비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만큼 인생을 낭비하며 산
사람이 되는데, 하나님은 양적인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를 보시지 않고 질적으로 산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를 보시고 상급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초림하신 그때부터 말세가 시작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데(벧전1:20), 본문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초림하신 그때부터 시작된 말세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2천 년이 지난 지금은 그만큼 말세의 끝이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는데, 이 시간에는 본문을 통해
종말을 사는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본론』
Ⅰ.첫째, 정신을 차려
근신하여 기도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1.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정신을 차려 근신하여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본문
7절을 보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만물의 마지막’이란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까웠으니’(h;ggiken)라는 말은 ‘가까이 끌다, 접근하다’는 뜻인데, 곧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임박한 상황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라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당시나 오늘날이나 모든 믿는 자들이 가장 소망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때이며, 성도들이 영원한 승리를 거두고서 주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때이기 때문에 모든 믿는 자들이 가장 소망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를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정작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1938년 10월 30일, 저녁 8시부터 9시까지 미국 뉴욕과 뉴저지 일대에 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CBS라디오에서
갑자기 음악 프로가 중단되고, 아나운서의 다급한 음성이 흘러나왔습니다. “지금 막 국방부가 발표한 긴급 뉴스입니다. 화성의 괴물들이
침입했습니다. 이것은 농담이 아닙니다. 화성의 괴물들을 방어하려던 국군은 전멸되고 말았습니다. 다리와 선박이 파괴되고, 모든 교통이
두절되었습니다. 밖으로 절대 나가지 마십시오. 지하로 들어가십시오.”
사실 이 날의 방송은 오손 웰스(Orson
Wells) 머큐리 극단이 연출하는 『세계 전쟁』이라는 새 연속극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정규 방송 프로그램 도중에 너무 실감나게 선전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 날 뉴욕과 뉴저지의 주민 약 1백만 명이 정신적 장애를 받고, 수 만 명이 완전 탈진 상태에 빠지는
혼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방송국의 지나친 광고 표현을 억제하는 법규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이 정도로 놀라고 마는 사건이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전무후무한 대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를 대비하여 평소에 정신을 차려 근신하여 기도로 준비한 사람들은 기쁨으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극도의 두려움과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2.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정신을 차려
근신하여 기도하며 준비해야 하는 이유 는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성도들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이 영적 분별력입니다. 본문 7절의 ‘정신을 차리고’라는 말은 ‘건전한 마음이 되다, 온전한 정신이 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근신하여’라는 말은 ‘술 취하지 않다, 분별 있다’는 뜻인데, 환경에 따라 요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잡는 조심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말은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오직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굳게 잡고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중심을 잡고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무절제한 생활을 버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영적으로 깨어 있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혼란시켜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말세에 나타나는 특징 중에 하나가 가치관의 전도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전도시켜 영혼을 위하는 일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기게 만들고, 대신 육신을 위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게 합니다. 그래서 말세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배를 신으로 삼는
쾌락주의에 빠져 땅의 일, 즉 본능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며 세상적 가치 기준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빌3:19) 그리하여 무익한
것을 얻기 위해 재물과 시간을 낭비하며,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말세에는 난리와 난리가 이어서
터지고, 기형적인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켜 놓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거짓 교훈들이
독버섯처럼 번져나가 신실한 성도들마저 여기에 유혹을 받는 위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바울 당시 가장 모범적인 교회 중의 하나로 손꼽혔던
데살로니가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일어나 미혹하자, 거짓 교사들의 말에 미혹되어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교인들이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미혹의 영들은 더 많이 역사 하게 되는데, 그들의 거짓 교훈이 너무 그럴
듯하기 때문에 진리 위에 서 있는 사람들조차도 혼돈에 빠질 정도가 되게 됩니다. 때문에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미혹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짓 교훈에 미혹되게 되면, 헛된 것을 좇는 데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거짓 교훈에 미혹되면, 진리를 따라
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따라 살지 못한 모든 것이 인생을 낭비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인생을
낭비하며 살지 않기 위해서는 바른 영적인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지 못하면 무익하고 헛된 것을 좇느라고 인생을
허비하게 되며, 진리가 아닌 것을 좇느라고 인생을 낭비하게 됩니다. 바른 분별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마음의 중심을 잡고서 기도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바른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만이 마지막 때를 인생을 낭비하는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Ⅱ.둘째, 열심히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말세에 사랑이
식어지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마24:12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세의 현상 중의 하나가 불법이 성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법’이란 부도덕성과 무질서한 방종을 가리키는데, 말세에는 전통적인 규범이나 가치 기준이
상실됨으로 인해 이런 불법이 성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말세에는 신앙이란 미명 아래 온갖 비신앙적인 작태와 방종과 타락이 난무하게 되는데,
최근에 텔레비전에 방영된 적이 있는 몇몇 정체불명의 종교 단체에서 신앙을 빌미로 삼아 비윤리적인 일들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말세에는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서조차도 불법이 성행하는 아노미 현상이 많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런 아노미 현상으로 인해
내적인 불화와 균열이 심화되어 사랑이 식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22:37-40에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성경의 핵심적인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딤후3:1-4에서 말세의 현상에 대하여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말세에는 사람들이 사랑대신 각가지 불법을 행하느라고 인생을 낭비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말세에는 불법을 행하느라고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2.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능력이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보면,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열심으로’(evktenh/)라는 말은 ‘꾸준히’란 뜻인데,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하라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라는 말은 그 어떠한 일보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아가페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아가페적인 사랑의
실천에 서로 힘써야 하는 중요한 일은 이런 사랑의 실천만이 피차간에 있는 허다한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세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가페적인 사랑의 실천만이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말세에 성행하는 불법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아가페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불법은 사랑을 식게 만들고, 사랑이 식어지게 되면 더 많은 불법이 성행하게
됩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아가페적인 사랑의 실천인 것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의 실천만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로 하게 하며,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바로 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을 헛된 일에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이 세상에서 질적으로 산 시간이 많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Ⅲ.셋째, 서로 대접하며
봉사해야 합니다.
1.봉사는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대접하기를’을 뜻하는 헬라어 ‘필록세노이’(φιλόξενοι)는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φίλος)라는 말과 ‘나그네’를 뜻하는 ‘크세노스’(ξένος)라는 말의 합성어인데, 나그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는 교통시설이나 숙박시설이 미비하였기 때문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 방법이었습니다.(딤전3:2, 5:10, 딛1:8)
특히 당시에는 고난과 핍박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쫓겨다니면서 전도생활을 하는 등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단순히 잠자리를 제공하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전도 사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사도들은 자주 나그네 대접에 대하여 언급을 하였습니다.(롬12:13, 히13:2,
요삼1:5-8)
그런데 여기에 보면,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힘에 겨울 수도
있었으며,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하지 말고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히13:1-2에 보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명의 손님을 대접한 일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인데(창18:1-21), 그들 중 한 명은 성육신하기 이전에 예수님이며 다른
둘은 천사였습니다. 따라서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하라고 한 것은 나그네를 대접하다보면 그 중에는 핍박을 피하여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도 있으며, 그들을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 뿐 아니라 간접적으로 복음 전파에 참여하는 것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봉사’란 남을 받들어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문 9절의 말씀은 봉사는 서로 원망 없이 대접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봉사하는 일은 그 자체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만, 비록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라도 서로 원망 없이
대접하며 봉사할 때 하나님의 선한 일에 동참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2.봉사의 방법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처럼 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은사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인데,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시는 것은 각자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 섬기는 자세로 상대방의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청지기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런 청지기의 삶의 목적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청지기란 본래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는 하인을
가리키는데, 각양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청지기로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통하여 교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각자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 대접하며 봉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가 더욱 튼튼하게 설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인생의 날수는 우리에게 주어진 봉사의 기회입니다. 우리 인생에 남아 있는 날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대접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대접을 하되, 원망 없이
하여야 합니다. 선한 청지기같이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대접하는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더욱 튼튼하게 서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봉사의 목적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데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라는 말은 성도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말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즉 성경 말씀처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성경의 말씀을 표본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는 말은 성도는 교회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봉사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공급해
주시는 것을 염두에 두고 힘껏 봉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같이 아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말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하고, 봉사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양 은사를 주신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
영광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서로 대접하며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교회를 튼튼하게 세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어진 은사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전 영역에서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아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양 은사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서로 대접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게으르고
악한 종이 되어 인생을 낭비하며 사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시간을 만들어 인간에게 아주 귀한 선물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은 생명처럼 귀한 것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시간들을 사람들은 죽이기도
하고, 흘려 보내기도 하고, 낭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조급해 합니다. 교통 체증에 걸렸을 때,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릴 때,
예배시간에 설교를 들을 때, 심지어 쏜살같이 달리는 자동차 안이나 비행기 안에서도 조급해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리고 있습니다. 눈을 감은 채 이런 일 저런 일을 하거나,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갑니다. 끊임없이 사고 팔며, 직업을 찾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승진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는 것입니다. 인생은 요람에서부터 무덤을 향해 쉴새없이 미친 듯이 달리는 존재인 듯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바쁘질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느긋합니다. 선한 일에 대해서는 때때로 뒤로
물러서거나 양보도 잘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너무나 느립니다. 구원받는 일이나 교회의 지체가 되어 봉사하는 일,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하는 일이
일, 성경을 읽거나 성경 공부하는 데에는 여유와 함께 늘 뒤로 미룹니다. 전도하고, 기도하는 일에는 한없이
느립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의사가 우리에게 살아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해 줄 때 비로소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울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때늦게 시간의 소중함과 헛된 일에 바쁘게 달려온 자신의 실존을 다시 조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알 수 없는 종말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오늘 끝날지, 내일 끝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한 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한 것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선한 일에 바빠야 합니다.
선(善)에는 철학적인 선, 사회적인 선, 율법적 선, 종교적인 선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선이란 바로 하나님이요, 선한 일이란 바로 하나님의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선한 분은 오직 한 분이시요, 선한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일뿐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며,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하며 봉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결과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삶이며,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의 마땅한 삶의 모습이며,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