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엡 2:1-7),김서년목사


   오늘 우리는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대림절’이란, 이름 그대로 ‘우리 주님께서 강림하심을 기다리는 기간’이란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친히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강림하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여 주시기 위해서 ‘죄 많은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 그것은 바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 값을 속량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 ―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는 때때로 그 은혜를 잊으며 살 때도 많고, 또 그 은혜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 잘 깨닫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오늘 누리고 있는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할 때의 모습을 항상 상기해 보라고 강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의 모습을 항상 상기해보라!!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계시는 얘기일 것입니다.
   어떤 날 토끼가 길을 가는데, 함정에 빠져있는 늑대를 보게 되었습니다.  며칠씩 굶어서 죽어가는 늑대가 토끼를 보고 사정을 합니다.  제발 날 좀 구해달라고 말이지요.
   토끼가 대답합니다.  건져주면 날 잡아먹을 것이 아니냐고요.  늑대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생명의 은인인데 백골난망일 것이라고 하며 사정을 합니다.  그래서 토끼는 불쌍히 여겨서, 기다란 나뭇가지를 내려서 살려주었습니다.
   함정 밖으로 나온 늑대가 그 순간 딴소리를 합니다.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니 어쩔 수 없이 너를 잡아먹어야겠다고 말이지요.  토끼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야단했지만 통하지가 않습니다. 
   마침 그 때 여우가 지나가기에 재판을 해달라고 청하게 됩니다.  토끼의 말을 들은 여우가 이번엔 늑대에게 묻습니다.  ‘토끼의 말이 좀 이해가 되지 않는데, 도대체 네가 어떤 상태에 있었기에 토끼가 저러느냐’고 말이지요.  그러자 늑대가 함정에 뛰어들면서 “내가 이러고 있었는데 말이지……”  그 순간 여우가 판결을 내립니다.  “그래, 너는 거기 그러고 있는 것이 좋겠다.”  그러고는 토끼와 함께 떠나버렸다는 얘기입니다.

   오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생각하려면, 지난날에 있었던 그 처참한—절망적인 모습을 항상 생각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어떤 형편에 있었느냐?  내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형편에 있었을 것이냐?!! ―  여러분,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광야에서 인도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속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너희는 애굽의 종 되었던 것을 잊지 말라.  너희는 애굽의 종 되었던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았느니라” 하고 일깨워주십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건망증이 심해서, 조금만 어려워지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그럽니다.  이거 말이 되는 일입니까?
   과거의 노예생활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쉽게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어제, 그리고 오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아니하는 상태 ― 예수 믿지 아니하는 사람 ― 구원받기 이전의 인간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한마디로 “진노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노의 자녀!! ― 하나님의 큰 노여움을 살 수밖에 없는, 구제불능의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뿐입니다.  무서운 저주와 심판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에 우리가 살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옛날의 모습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간단하게 오늘 본문은 ‘죽었다’ 라고 말씀합니다. ― 죽었었고, 그리고 지금은 살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살리셨다고 하는 원리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 ‘죽었다’고 하는 말은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을 맞아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그런 미래적 운명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 죽음의 상태란 이렇게 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사망의 그늘에 매입니다.  사망의 노예가 됩니다.  죽은 상태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영적 죽음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죄로 죽었다’고 말씀하시는데, 바로 이 ‘죄’란 무엇입니까?
   ‘죄’라고 하는 것은 성경 원문에는 ‘하말티아’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하말티아’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죄’라고 하는 말과는 좀 다른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화살이 표적을 빗나갔다’고 하는 뜻입니다.
   화살을 쏠 때 저 앞에 표적이 있지 않습니까?  쏜 화살이 그 표적에 딱하고 맞아야만 되는데, 그런데 그 표적에 맞지를 않고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말티아’입니다.

   ‘죄’라고 하면 우리는 대체로 외형적, 도덕적 죄를 많이 생각합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이런 것들을 대부분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죄’라고 하는 것은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녁이 있고 그 과녁에 맞아야 하는데, 그 과녁에서 빗나가버린 것 ―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인간이란 존재!  창세기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되어야 할 인간본질!―여기에서 떠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당연히 이런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이러해야 하는데,  아버지는 이러해야 하고 어머니는 이러해야 되는데, 목사는 이러해야 하고 장로는 이러해야 하고 권사는 이러해야 하고… 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어야 할 존재로서 ‘되어 짐’의 이 과녁이 있는데, 이 과녁에서 빗나갔습니다.  그럴 때에 이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빗나가고 나면 이제 사망의 노예가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면, 이와도 같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학생이 있습니다.  학생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공부를 하는 것이지요.  공부하는 그것이 바로 학생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밖으로 나가면, 소위 가출을 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 순간부터 많은 죄와 타락과 나쁜 친구들에게 붙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되어야 할 존재로서 되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죄라는 개념으로 설명이 됩니다.  이래서 이제 이들이 ‘죄의 결과’로서 ‘영적으로 죽었다’ 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은 ‘허물’이라는 말입니다.  “허물로 죽었다”고 하시는데, 이 ‘허물’이라는 말은 성경 원어로 ‘파라프토마’란 말입니다.  이 말은 ‘미끌어졌다’는 듯입니다.  가야 할 길이 있는데 그 길에서 빗나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빗나갔다란 말은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말과는 좀 다른 의미를 말합니다.  ‘하말티아’는 과녁에서 의식적으로 빗나간 것이고, ‘파라프토마’는 실수로 빗나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끄러진 것입니다.  내가 넘어지고 싶어서 넘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만 넘어졌습니다.  이것을 ‘파라프토마’라고—‘허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파라프토마’란 말에는 무슨 의미가 들어있는가 하면, 이미 죄로 인해서 그 성품 속에 나약함이 있고 영적 장애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볼 것을 못보고, 서야 할 시간에 서지 못하고,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고, 미끄러지게 된 것입니다.
   좀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드리자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돈에 대해서 실수를 하고 큰 죄를 지었던 사람은 앞으로도 돈에 대해서는 약합니다.  돈만 보면 실수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여자에 대해서 번번이 실수하는 사람은, 이제 회개한 다음에도 여자에 대해서는 약합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면, 술을 안 먹던 사람은 아무 때에도 술이 그다지 반갑지 않습니다.  아무리 갖다놓아도 냄새부터 싫습니다.  그러나 술에 인박힌 사람은 십 년이 지나간 다음에도 술 냄새가 맡아지면 ‘아, 좋구나!’하게 되거든요.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아무리 결심을 하려고 해도 그것이 어렵습니다.
   담배도 그렇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아프지 않습니까?  그러나 담배에 인박혔던 사람은 담배연기에 약합니다.  그저 좀 심심하기만 하면, 또 입이 조금 텁텁하다고 느낄 때마다 담배생각을 하게 되고, 어쩌다 남이 피우는 담배연기를 맡으면 속으로 은근히 ‘좋구나!’ 하지를 않습니까?  이런 것이 바로 ‘허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는 의식이 동반하고, ‘허물’은 이미 죄지었던 것 때문에 회개한 다음에도 그 나약성—그것이 체질로 남아서, 생각지 않은 사이에 그냥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그쪽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와 허물, 이로 인하여 우리는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영적으로 죽게 되면 어떤 결과가 오느냐? ― 오늘 본문은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고’,  또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그리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게 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 됨의 존재적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여기서 떨어지면, 바로 그 뒤에는 이 같은 함정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우상을 섬긴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내가 우상이 되든지, 돈이 우상이 되든지, 명예가 우상이 됩니다.  어느 사이에 우상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먼저, 세상 풍조를 따르게 된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고’ ― 이 말을 좀 의역하면 ‘세상유행을 좇고’라는 의미입니다.  세상풍속 흘러가는 것 거기에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휩쓸리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옷을 입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연예인들이 입고 있는 옷을 보니까 좋더라고 해서 나이 든 사람이 그대로 따라 입는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의 체형에 맞게, 또는 나이에 맞게 입어야 합니다.  무비판적으로, 남이 그런다고 해서, 그냥 따라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세상풍속이라고 하는 것은 비판적으로, 선택적으로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노아에 대해서 창세기 7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대에서’라고 특별히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청문회에서 ‘관행이었다’고 변명하는 말을 듣곤 하지 않았습니까?  남이 다 한다고 해서 나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라고 하는 것은 ‘곧고 바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향해 바르게 가는 것 ― 이것이 ‘의’인 것입니다.
   그런데 목표 이것은, ‘내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에 대해서 ‘내 앞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눈에 어떠냐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정의를 말합니다만, 이 정의라고 하는 것은 법적인 개념으로서 나라마다, 또 사람마다 다른 것입니다.  내게 정의가 다른 사람에게도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정의가 일본에서의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내 판단을 기준으로 행동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래서 ‘정의’라는 말과 구별하여서 ‘공의’라고 하는 말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눈에,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는 것!” ―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항상 추구하는 것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에 실려 그대로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물고기는 그 물살에 휩쓸리지를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은 물고기처럼 이 세상 풍속에 그냥 휩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무의식적으로—무비판적으로 세속에 끌려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은 그 당시 헬라사람들의 ‘삼층천 우주관’에 따라서 나온 것입니다.  당시 헬라사람들은 ‘지상층’이 있고, ‘공중층’이 있고, 그리고 ‘하늘층’이 있다고, 이렇게 세 차원으로 우주를 이해했습니다.
   먼저 지상층에는 사람이 살고 동물이 살고 식물이 살고, 이렇게 생물들이 사는 이 세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공중에는 악마가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마귀들이, 특히 그리스의 신화를 여러분 잘 아시지요.  거기 보면 이 공중에는 별의별 신들이 다 있어가지고 저희끼리 결혼하고, 싸우고, 시기하고 질투하곤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공중입니다.  이 공중 중간층에는 악령들, 온갖 신들이 있어가지고 제멋대로들 싸운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이것을 넘어서 저 위에 삼층천이 있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세계가 있고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으로 해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는 말은 곧 악마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죽으면 이제 그 악마를 섬기며 따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세요. 얼마나 많은 우상을 섬깁니까?  집안에 산사태로 바위가 굴러들어왔는데 오히려 거기에 절하고요,  소가 되새김질을 하며 소리를 내는데 그게 목탁소리 같다고 하면서 ‘보살님’이라고 소에게 절하고요……  얼마나 쓸데없는 짓입니까?
   그러나 그런 어리석은 짓들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하면 큰일 나는 줄로 알고 말이지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간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영이 이성을 지배하고 이성이 몸을 지배하게 마련입니다.  육체가 이성의 말을 잘 듣도록 오리엔테이션이 된 사람, 훈련이 된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람은 먹는 것도 아무거나 먹는 것이 아닙니다.  몸에 유익한 것을 헤아려서 먹고 또 적당하게 먹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이 아니고 병리적으로 기울어진 사람은 먹어서는 안 될 것만 좋아합니다.  이상하게도 꼭 먹어서 좋을 것은 싫고, 먹어서 나쁠 것만 좋아합니다.  그 쪽으로 입맛이 동합니다.
   그 뿐 아니라 생각도 그쪽으로 동합니다.  해서는 안 될 짓만 하거든요,  그쪽으로 매력을 느끼고 그 쪽에 재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육과 이성과 영이 있지 않습니까?  이성이 옳은 일과 그른 일을 판단해 주는데, 그러므로 우리의 육은 이 이성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이성이 죽었어요.  그래서 육체의 소욕대로 따라가니, 육체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큰일인 것입니다.
   또 이성은 영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영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영의 지배를 이성이 받고, 몸은 이성의 지배를 받아서 잘 조종이 될 때, 그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를 못해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이성도 병들었습니다.  그런고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요.  불쌍한 일이지요.  얼마나 미련합니까?

   뉴스의 보도에 보면, 우리나라에도 마약환자가 늘고 있다고 그럽니다.  마약! 이것은 죽게 하는 것이고 망하게 하는 것인데도,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끌리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육체의 욕망에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의 영, 그의 이성은 다 죽어버린 것입니다.  제 구실을 못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점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그들’이라는 어떤 별도의 다른 사람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에는, 또한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내가 말이지요!!  이것을 알고, 또 인정해야, 그 크신 은혜를 바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르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하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절에 보면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하고 말씀합니다.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 우상이 이끄는 대로, 죄가 이끄는 대로, 육체의 욕망이 끄는 대로 그냥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하고 비참한 모습입니까?!!  이것이 바로 나의 옛 모습이요,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면 나타날 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살았다” 하십니다. ― 어떻게 살았느냐?
   오늘 본문은 대단히 중요한 신비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5절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하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우리가 함께 죽었고,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께서 부활하실 그 때에 원리적으로 내가 살아난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유명한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미 죽었습니다!  앞으로 죽는 것이 아니고 지금 죽는 것도 아닙니다.  벌써 죽었습니다.  벌써 나는 죽었다, 십자가에 죽었다 합니다.――나로서 죽고, 율법으로 죽고,  그리고 그리스도로 살고, 은혜로 살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부활하는 그날 아침에 내가 부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은 항상 현재적입니다.  계속적으로 현재적입니다.  부활도 계속적으로 현재적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오늘도 나로서 죽고 은혜로 살고, 율법으로 죽고 은혜로 살고, 나로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과 같은 그런 정체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함께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6절에 “또 함께 일으키사…”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함께 일으키셨다!  무슨 말씀입니까? 
   나 혼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 객관적 사건과, 그를 내가 믿어서 그리스도 안에 연합될 때,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은 꼭 내가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를 살리셨다는 것은 나를 살리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꼭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죽음!, 동시에 나의 부활! ― 나의 죽음과 나의 생명을 함께 생각하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그렇게 함으로, 거기서 우리는 ‘나’라고 하는 이 존재, 이 생명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크신 은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입은 나라고 하는 이 존재!!!”


   존 뉴턴 목사님에 대한 얘기는 이미 여러분이 여러 번 들어서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존 뉴턴은 영국 상선의 선장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할 수없이 열한 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탑니다.  거기서 선원들의  그 포악한 행동, 언어, 거친 문화 속에서 난폭한 성격으로 자랍니다.  그러다 마침내 뉴턴은 반항을 하고 문제를 일으켜서 배에서 쫓겨납니다.
   그 후로 방탕한 생활, 말할 수 없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든 중 배운 것이라고는 배타는 것밖에 없어서, 다시 배를 타게 되고, 그리고는 노예선의 선장이 됩니다.  아프리카에 가서는 원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짐승 잡듯이 붙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넘기는 것이지요.
   이러든 그가 토마스 아켐피스란 사람이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는 책을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됩니다.  여기서 크게 감동을 받아 성경을 읽게 되고,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지난날을 생각해 봅니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노예로 팔아 넘겼고……  그런 말 못할 죄를, 그 수많은 죄를 생각해보니, 죄를 회개하고 회개해도 끝이 없고, 그래서 항상 울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어 82세까지 늙도록 오직 복음을 증거하면서 살아갑니다.  그의 설교의 주제는 ‘주님의 그 크신 은혜!’ 오직 그것이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나는 과거에 노예선장이었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속하심으로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가 죄 사함을 받고, 이제 나는 오직 그 은혜로 사는 것이오!!’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항상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하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또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예수를 안 믿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럴 때 우리는 오늘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됩니다.  특히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사도바울처럼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저 아래 내가 죽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바로 거기에 내가 부활했습니다!!

   이런 신비로운 생명을 체험하면서, 그 정체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감격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이 대림절을 지키고,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