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성장

(엡4:13-16)김서년목사


   윌리엄․워즈워쓰란 영국의 시인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시를 지어 읊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모두가 다 한때 어린이였고, 또 지금의 어린이들도 머지않아 다 어른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시인의 말은 납득이 가는 표현입니다.
   우리말에도 “아이들 크는 것을 보니 세월이 가는 것을 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아이들은 보면 무척이나 빨리들 성장을 합니다. 특히 요즈음 아이들을 보면 영양이 좋아서 그런지, 중학생 정도만 되어도 벌써 우리 세대 부모님의 키를 넘어갑니다.

   그러나 몸만 빨리 커진다고 곧바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연륜과 함께 교양과 인격이 아울러 성장해야 바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 된 어른들에겐,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위탁해 주신 이 자녀들을 어떻게 가르치며 양육해야 하는가?” 하는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몸이 자라듯 지식도 자라야겠고, 인격도 자라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해 주신 그 모습―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믿음이 더욱 자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린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닙니다.  비록 어른이라고 하지만 우리 모두도 ‘계속’, 그리고 ‘더욱’ 믿음에 있어서 성장을 하여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참으로 예쁘고 귀엽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 귀여운 모습 그대로 있었으면’ 하고 때때로 말하기도 합니다만, 그런데 만약, 정말 아이가 지금의 모습 그대로 있게 된다면 ― 그야말로 큰일 날 일이지요.
   어떤 존재이던 생명을 가진 존재는 움직이고 성장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장이 없다고 한다면 무엇이 됩니까?  그 존재는 곧 죽은 무기체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성장해야―자라나야만 생명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아, 우리는 어린 아이의 성장을 생각하며, 동시에 우리 모두의 ‘크리스챤으로서의 성장’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국의 기후는 사계절이 뚜렷하기 때문에, 정말 봄만 되면 참으로 신비한 광경이 우리 눈앞에 펼쳐집니다. 겨울 내내 꼭 죽은 것만 같았던 나무들이 어느 틈엔가 움이 돋고 꽃이 펴서, 온 천지를 울긋불긋 아름답게 수놓습니다.
   또한 ‘그런가 하는 사이’에 온 천지가 어느 틈엔가 짙은 초록색으로 바뀌어집니다. 그러면서 훌쩍 높이들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만 해도 보세요. 몇 해전만 해도 주변 울타리 정도의 크기였는데, 이제는 푸르게 교회 주변을 덮고 있습니다.

   이 자라나는 나무들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이 나무들은 이렇게도 무럭무럭 성장을 하는 것입니까?
   생명이 있는 식물들은 모두가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땅으로부터 수분과 영양을 섭취합니다.  땅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 식물은 마르지 않고, 여름의 뙤약볕 아래서도 뜨거울수록 더욱 더 잘 자랍니다.
   그러므로 성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뿌리이며, 또한 ‘뿌리를 어디에 내렸느냐’ 하는 것이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옥토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식물은 햇볕이 뜨거울수록 더욱 잘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흙이 얕은 곳에 서 있던가,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식물은 햇볕을 견디지 못하고 금방 시들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인격도 ‘어디에 뿌리를 내렸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속에 뿌리를 내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그의 높은 인격에 우리의 뿌리가 내려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 속에 뿌리를 내린다’는 이 말, ― 다시 말해서 나 자신과 또한 우리의 자녀들이 뿌리를 내려야 할 ‘좋은 옥토’란 이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한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결국 환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모든 삶의 환경을 이런 믿음의 분위기로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들으신 분이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미국에서 암 전문의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원씨 성을 가진 어느 교포 의사가 간증을 통해,  비록 자기가 자랄 때는 너무나 가난해서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러나 그 추운 겨울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갔다 오시는 어머니께서 교회에서 오시자 곧바로 자고있는 자기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기도를 하셨는데, 어머니의 한결같은 그 기도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주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교육학에서도, 그 동안 교육의 삼대요소로서 ‘교사’와 ‘학생’과 ‘교재’―이 셋을 말하여왔는데, 이제는 이보다도 더 중요한 요소로서 ‘환경’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가정을 정말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래서 우리의 모든 자녀뿐 아니라 모든 식구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숨쉴 수 있는 ‘믿음의 환경’이 되게 하는데 우리의 모든 노력을 최우선으로 기우려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크리스챤의 성장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는 조화를 통하여 이루어짐을 오늘 본문은 말하여 줍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는 바’와 ‘아는 바’가 동시에 균형을 이루어, 서로 협력하여서 성장하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어느 분이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아는 만큼 믿게 되며, 믿는 만큼 알게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어떻게 그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가령 여러분이 선교사가 되어서 어느 부족에게 전도를 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무엇부터’ 시작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실 것입니까?

   먼저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쳐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우리 인간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분이시며, 특히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분이신지……
   그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우리 인간을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셔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또한 내가 죽었어야 할 그 자리에 그분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그래서 그가 죽으심으로 내가 살고, 그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이 사실을 알게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 하고 이름만을 부르고 믿는다고 한다면 ― 그는 그저 ‘이름’만 종래에 그가 부르던 잡신의 이름을 ‘하나님’으로만 바꾸었을 뿐이지, 여전히 옛날 잡신을 믿던 그 믿음대로 믿고 있는 결과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아는 일에 있어서 성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교회학교 뿐만 아니라, 우리 장년을 위해 금년엔 새롭게 구역을 목장으로 개편하였으며, 수요일은 특히 성경 강해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리고 전도학교를 비롯하여서 주간 중에도 여러 개의 ‘성경공부반’을 개설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프로그램을 여러분, 적극 활용하시고 참여하여서, 아는 것에 있어서 성장을 이룩하는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성장은 언제나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는 것― 즉 깨달음이 따르지 못하면,  믿음에는 감격이 없고, 확실한 터가 잡히지 못하며, 이 깨달음이 없이는 믿는 바를 확실하게 증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아는 것’이 단순한 ‘지식’으로 끝나고 만다면, 이것 또한 올바른 성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심지어는 마귀까지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이 한번은 거라사 지방으로 지나가실 때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귀신이 알아보고는 큰 소리로 외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는 아직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지’를 전혀 알고 있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누구보다도 귀신이 제일 먼저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기에 야고보서를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아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알고 떠느니라”고 ― 단순히 알고만 있는 사람을 질책하시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입니다.  말하자면 ‘머리’로서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성장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 마음에 뜨거움을 주고, 모든 의심과 나약함을 넘어 설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성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깨달음과, 가슴으로 뜨겁게 받아들임과, 실천하는 신앙으로 성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어느 목사님께서 간증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우리나라에 댐이 많이 건설되어서 좀 가물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만, 그런데도 여전히 가뭄이 계속되면 농사가 크게 흉작이 되곤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어렸던 시절에는 이런 댐 같은 것은 아예 없었고, 오로지 하늘에 맡기고 농사를 짓지 않았습니까?
   매 해 제때 비가 와 주고, 장마도 오고, 또 뙤약볕도 내리 쪼면 그 해는 대풍이 되지만,  행여나 5월이 지나도록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계속되면 온 나라가 걱정에 싸이곤 하였지요.
   그래서 기우제를 드리고, 신발을 지붕 위에 엎어놓고 야단인데, 교회에서도 국가적인 근심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비를 오게 해 달라고 연합적으로 집회를 갖고, 통성으로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이 목사님께서 이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집을 나서는데, 그 목사님 댁의 여덟 살 먹은 막내아이가 우산을 들고 쫓아 나오며 “아빠, 우산 갖고 가야지요”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얘야, 이렇게 가물고 해가 쨍쨍한데 우산은 무슨 우산이니?”  그랬더니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아빠, 지금 하나님께 비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러 가잖아, 그러니 올 때는 비가 올게 아니야?”
   이 목사님은 그 말에 크게 뉘우치고, 자신의 믿음 없음을 회개했다고 합니다.  비 오게 해 달라고 기도는 하면서도 믿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의 간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아이의 말을 듣고 난 후,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의 믿는 태도가 근본에서 잘못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가뭄 속에서도 오히려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남들이 기우제를 드리고 있는데 우리도 그냥 있을 수는 없지 않으냐?’ 하며 덩달아 ‘기도회를 가지자’고 하고 있는 ― 사람의 눈에 체면치레나 하려고 하고 있는,  또한 남이 기우제를 드린다고 덩달아 기도하자는 자세부터가 미신적인 것으로서 ― 우리의 믿음 자세가 근본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내가 생각하는 지식의 한계까지만 믿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또는 내가 경험하는 ‘이해의 한계’까지만 믿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과 희생과 모순 속에서도, 깊이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그의 깊은 뜻을 믿을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성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말은, 그저 우리가 어렵고 괴로울 때 ― 기도만 하면 재깍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으로서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어려움과 희생과 모순되게 보이는 모든 것을 통하여서  더욱 깊이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그 뜻과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계속하여 이같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오히려 깨닫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믿음으로 성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사랑하는 줄 안다”라고 말할 때, 이 ‘사랑을 안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아십니까?

   참된 사랑이란 ‘사랑을 받고 싶고 또 사랑을 주고 싶은 사랑의 대상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자기를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은 가끔 자신이 ‘사랑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가끔 보고 싶거나 생각이 나면, 마치 그것이 사랑인 줄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르고 싶은 마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 비판이 있고, 갈등이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한낱 감상일 뿐입니다.
   사랑의 성장이란, 그가 나를 따르고 닮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있기를 바라고,  내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내가 그 사람의 뜻과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사랑하심을 아는 자는, 하나님께서 내 편에 서 주시기를 바라지 않으며, 오직 내가 완전히 부정된 모습으로 내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런 사람의 기도는 따라서 “주여, 나의 뜻을 완전히 부정하시고, 오직 주님의 뜻만 따르고, 주님의 뜻만이 내 안에 있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한다면, “내 뜻을 강제로 꺾고서라도 때릴 때는 때리시고, 칠 때는 치심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참된 사랑이란 멀찍이 떨어져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깊고 넓은 사랑에 감격하여, 완전히 그 속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부모님의 사랑을 안다’고는 하였지만 진실로 안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는 내게 사탕을 주고,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해 주는 것이 사랑인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점차 성장을 하면서, 부모님의 ‘칭찬’만이 아니라 ‘매’ 역시 내게 있어서 귀중했고,  또 그의 ‘웃음’보다는 ‘눈물’ 속에 ‘더 큰 사랑’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같은 깨달음―이 같은 성장을 이룬 사람은, 그러기에 기쁠 때나 어려울 때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역사 하심과 그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것이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같이 성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 15절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지라”고 강조합니다.
   사랑을 받던 자리에서 사랑을 주는 자세로,
   받을 것을 생각하던 마음에서 이미 받은 것을 감사하며 만족하는 자세로,
   친구나 나를 좋아하던 사람만을 사랑하든 자세에서, 나를 미워하거나 나에게 무관심한 자 까지도 사랑하는 자세로 ― 이렇게 여러분 모두가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실과 거짓이 혼합되어 살아가던 생활에서, 거짓을 떨쳐 버리고 점차 진실만을 나타내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점점 거짓과 어두운 삶이 없어지고,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떳떳하고 깨끗한 심령이 되어, 담대한 힘을 얻고,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성장해 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본문의 말씀은 우리 크리스챤의 성장에 대해서 “범사에 자랄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어느 영국의 신학자가 쓴 수필에 이런 고백이 쓰여 있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소위 ‘신의 죽음의 신학’이란 것이 한창 유행하던 때에, 여러 신학교 교수와 학자들이 어느 집에 모여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하심에 대하여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 ― 모두 고상하고 철학적인 용어로서 말을 주고받았지만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중에 “아무개 박사의 하나님은 아무래도 주무시는 모양이요” 또는 “어디 출장을 가신 모양이요.” 그래서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니, “죽은 것은 아니냐” 하는 등의 심한 농담을 나누었습니다.
   그 때, 그 집에서 일하던 처녀아이가 차를 끓여 나오다가 그 말을 듣고는, 차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용기를 내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선생님들,  모두 훌륭한 선생님이신 데, 이제 제가 들으니 ‘하나님은 침묵하신다’니, ‘주무신다’니, ‘돌아가셨다’고 하시니, 매우 놀랐습니다.  왜냐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저이지만, 저는 매일 하나님을 만나고 있거든요.”
   “나는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내게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으로 믿어요.  그래서 세수할 땐 ‘하나님, 내 마음도 이렇게 깨끗하게 해 주세요’ 기도하고, 청소할 땐 ‘하나님, 내가 이 방을 깨끗이 하듯 이 세상도 깨끗이 쓸게 해 주세요’.  밥을 할 때는 ‘하나님, 이 육의 양식과 함께 영의 양식도 허락하여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 그 때 그 때 나는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심을 믿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저 멀리서가 아니라, 이렇게 내 주위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으니까요.”
   이 말을 들은 그 교수들은 모두들 크게 뉘우치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는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범사에 자란다’는 이 말은 거창한 신학적 용어를 빌릴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우리의 생활에서 믿음을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주보 표지에 보면 “말씀의 생활화, 온전한 기도생활, 찬송하는 생활신앙”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바로 범사의 생활을 통한 생활화된 믿음의 성장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우리 주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풀 한 포기를 보시면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입히신다고 말씀하셨고, 공중에 나는 새를 볼 때에는 하나님이 저들을 먹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풍랑이 얼어 났을 때에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심하였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의 고난이 다가 올 때에도,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범사에 이렇게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다시 말해서 나의 생활에서―일상의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을 깨닫고, 거기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삶을 우리는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소녀아이와 같은 믿음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시고 가까이 그들을 부르시면서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며, 어린아이가 성장을 하듯 우리의 믿음생활에도 더욱 성장을 이루는 결단을 모두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 우리는 믿음에 뿌리를 내린 사람입니다.  더욱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 계속 성장함으로, 범사에 그에게까지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