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왕상 17:8-16
저자 : 이삼규 목사
세계적인 부호인 카네기의 어린 시절은 비참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가족들이 빵 한 조각을 서로 먹겠다고 다툴 정도였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카네기의 부모는 중대선언을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모두 흩어져 살아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굶어죽을 수는 없다."
가족들은 빵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때 소년 카네기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한 가지 결심했습니다. "가난을 영원히 날려 버리겠다. 이 고통의 순간을 절대로 잊지 말자" 카네기는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부호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영국의 한 신문기자가 카네기에게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반드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가난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 성도들도 잘 아는 스토리입니다. 아합 왕이 북 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절 하나님의 진노로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한재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은 주변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한재를 선포하고 그릿시내가로 가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조석으로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날라 왔고 시냇물을 마시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릿 시내도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엘리야는 그곳에 머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왕상 17: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어디로 보내셨습니까?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시돈이 어느 나라입니까? 이세벨의 모국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듯이 하나님은 원수의 심장에 엘리야를 보내신 것입니다.
‘사르밧’이라는 지명은 ‘차르파트’라고 하는 데 ‘차라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 뜻은 ‘정련소’라는 의미입니다. 요즘 표현으로는 ‘제련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르밧에 살고 있던 과부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선지자를 공궤하라!’ 그녀에게 넉넉한 물질이 있어서 그런 명령을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 이었습니다. 그것으로는 자그마한 빵 하나 만들어 먹기도 힘겨운 것입니다. 그런 과부에게 하나님은 선지자를 공궤하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르밧은 엘리야나 과부 모두에게 연단하는 제련소였습니다.
가난은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르밧 과부가 받은 축복은 가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기적이 가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가난을 잘 다루면 보화를 캘 수 있습니다. 무한한 부요의 씨앗이 담겨져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난이라고 하는 용광로에서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도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삶 속에 비밀이 담겨져 있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 가난을 부요로 변화시키는 원리를 배우고자 합니다.
가난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기회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하게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특히 게으름 때문에 온 것이라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자를 싫어하십니다.
잠 24:30 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잠 24:31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잠 24:32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잠 24:33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잠 24:34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하나님은 게으른 자를 악하다고 말씀 하십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잘 아시지요?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게으르다 책망 받았습니다.
잠언의 말씀을 보면 게으른 것과 함께 지혜 없이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경고합니다. 게으른 것도 나쁘지만 지혜 없이 사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타락과 방종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면 회개해야 합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와 쾌락에 탐닉하는 것이나, 땀 흘리지 않고 쉽게 부자가 되려고 도박하는 것, 그리고 남을 속여 쉽게 부자가 되려는 것 등은 모두 죄입니다.
가난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그 중에 천재지변 때문에 생긴 가난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소녀 소년 가장으로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일해도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하나님은 그 가난을 이해하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사르밧 과부는 게으른 여인이 아닙니다. 과부되었기 때문에, 시돈 땅에 기근이 임했기 때문에 가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르밧 과부의 가난이 어떻게 부요함으로 바뀔 수 있었을까요?
1)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입니다.
시돈 땅에 과부가 한 사람 밖에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수많은 과부가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과부 가운데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에게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과부가 엘리야 선지자를 만난 것도, 그 말에 순종할 마음이 생긴 것도, 순종한 것도 순전히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마음이 움직이고 주머니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가나한 자를 능히 부요케 하실 수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날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에 분당급 신도시를 세운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여기 저기 신도시가 세워질 것이라고 말이 많았는데 드디어 신도시가 세워질 지역을 선정하여 발표한 것입니다. 그 동네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골 촌 동네가 일약 부자로 변신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면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셔서 풍성한 부요를 누리게 하실 수 있습니다.
대상 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신 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도다
부자는 부요함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모든 부요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 또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얼마든지 부요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구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얼마든지 인생은 역전될 수 있습니다.
2)가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부요함으로 변합니다.
사르밧 과부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겠습니까? 가난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였던 것입니다. 가난이 부요로 바뀌는 것은 한 순간에도 가능합니다. 그 한 순간은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즉 가난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가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보는 시각이 다르고 해석이 다릅니다. 가난을 긍정적으로 해석합니다. 가난을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가난 속에서 비전을 봅니다.
엘리야는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들을 통해서 먹이시는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은 가난하지 않았다면 경험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는 사르밧 과부의 마지막 가난을 더욱 심화시킴으로 부요를 경험케 하였습니다. 그는 부족함이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임을 알았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은 포도주가 떨어짐으로 맛본 기적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무리들에게 먹일 것이 넉넉하게 없을 때 생긴 기적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가난 속에도 분명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망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난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창조하는 원리
사르밧 과부가 어떻게 가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는지 살펴봅시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를 배워야 합니다. 사르밧 과부가 자신의 가난에 어떻게 반응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응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라!
극한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길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으로 일하기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를 축복하실 때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것으로 축복하셨습니다.
왕상 17:12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 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여인에게는 가루 한 움큼과 조금의 기름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무어라고 말합니까?
왕상 17:13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왕상 17: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어떻게 보면 엘리야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과부가 마지막 남은 가루로 선지자를 위하여 음식을 만들 때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옛날에는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요즘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얼마나 힘들게 보릿고개를 넘겼습니까? 한 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자기들은 못 먹어도 손님은 대접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손님의 밥상을 쳐다봅니다. 엄마가 말합니다. ‘애들아 손님이 밥 남기면 나중에 줄게’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손님이 밥에다 물을 말아버린 겁니다. 손님이 남기기만 학수고대하던 아이들이 그만 눈물을 터트립니다. “엄마 밥 말아버렸어!” 이것이 우리들이 어렸을 때 흔히 있었던 일입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있었던 것은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의 씨앗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 가져오라 하시지 않습니다. 있는 것을 통해서 기적을 창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에게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헤아려 보십시오. 은과 금만 우리를 부요케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요케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우리에게는 가장 부요한 예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비록 가난한 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부요한 자인 줄 믿습니다. 더 나아가 믿음을 가진 자는 부요한 자입니다.
계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사르밧 과부는 비록 가난했지만 실상은 부요한 여인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집을 방문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믿음을 강하게 해 줄 사람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아직도 남은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기적을 창출하시기 때문입니다.
2)남아 있는 것을 먹지 말고 하나님께 심으라!
사르밧 과부는 자기에게 남아 있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하나님께 심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➀심을 씨앗과 먹을 양식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농부가 씨앗을 먹을 수 있습니까?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먹어버리면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곧 미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농부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구분해서 주십니다.
고후 9: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애굽 땅에 7년 흉년이 들었을 때 요셉을 찾아온 사람들이 구한 것은 심을 씨앗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창 47:19 우리가 어찌 우리의 전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식물로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고 전지도 황폐치 아니하리이다
요셉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 47:23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날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전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창 47:24 추수의 오 분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사분은 너희가 취하여 전지의 종자도 삼고 너희의 양식도 삼고 너희 집 사람과 어린 아이의 양식도 삼으라
요셉과 가난한 애굽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양식보다 심을 씨앗, 즉 종자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가난해도 종자 씨앗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는 과부에게 아주 힘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먹을 양식을 씨앗으로 심으라는 것입니다. 먹으면 양식이지만 나누면 씨앗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십일조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일조는 종자와 같은 것입니다. 십 분의 구는 먹어도 되는 양식입니다. 그런데 씨앗까지 먹어버리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해 미래를 위해 심을 씨앗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구원의 법칙이 아닙니다. 축복의 법칙입니다. 부요함의 법칙이자 풍성함의 법칙입니다. 우리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보호의 법칙이며,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축복의 법칙입니다. 십일조를 통해 부요함의 법칙, 미래를 준비하는 법칙, 심고 거두는 법칙을 배우게 됩니다.
➁작은 씨앗 속에 엄청난 잠재력이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마지막 양식을 씨앗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 속에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보았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음식을 먹으면 그녀와 아들의 인생은 끝나지만 그것을 심으면 놀라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엘리야가 본 것은 사르밧 과부가 만들어 오는 작은 떡 속에 있는 부요함이었습니다. 기근이 계속되는 삼년 육 개월 동안 먹고도 남을 풍성함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위해 만든 작은 떡 속에 무한한 잠재력이 담겨 있었습니다. 축복된 미래가 담겨 있었습니다. 과부의 미래 뿐 아니라 아들의 미래도 달려 있었습니다. 작은 것을 소홀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바로 작은 것 속에 담겨 있습니다.
➂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먼저 심고 나중에 거두는 것이 지혜입니다.
엘리야는 거두기 전에 먼저 심으라고 합니다. 즉 먼저 자기를 위해 떡 한 조각을 만들어 오라고 말합니다. 사르밧 과부가 심는 씨는 사실 엘리야를 위해 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심는 것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마지막 떡을 먹지 않고 씨앗으로 심게 한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우선 십일조를 드리도록 만드는 것, 소년의 도시락을 먼저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씨앗을 심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심어야 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찾아가기 전에 하나님이 사르밧 과부를 찾아가신 것이 분명합니다.
왕상 17: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왕상 17: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사르밧 과부는 분명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찾아와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 번 들은 것입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불순종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왕상 17:15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왕상 17:16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사르밧 과부는 순종하였습니다. 마지막 양식을 양식으로 삼지 않고 씨앗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 씨앗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심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가난을 부요로 변화시키는 원리를 깨달으셨습니까?
순종해야 복을 받습니다. 순종은 축복의 원리입니다.
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하나님의 말씀은 이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음식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공궤하는 것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항상 심는 것이 먼저입니다.
풍성한 축복을 거두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심으십시오. 항상 심는 것이 먼저입니다. 드리는 것이 먼저이고 나누는 것이 우선입니다. 심기 위해 언제나 씨앗을 준비하십시오. 심을 씨앗만 있다면 풍성한 미래가 있습니다.
어떻게 심어야 많이 거둘까요?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둡니다.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 한다면 양심불량이 아닙니까?
고후 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사르밧 과부는 적게 심었을까요? 많이 심었을까요? 많이 심었습니다. 전 재산을 다 심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크게 보셨습니다. 전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헌신의 정도에 따라서 평가하십니다. 많이 심으십시오. 그러면 많이 거두게 됩니다. 우선순위를 잊지 마십시오. 씨앗이 먼저입니다. 십일조가 먼저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한 사람은 복의 근원이 됩니다.
왕상 17:15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엘리야의 선택과 결정은 잘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지극히 미안한 일이었지만 사르밧 과부가 만들어 준 떡을 먹은 것은 잘한 일입니다. 엘리야는 섬김을 받음으로, 대접을 받음으로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때로 대접을 받음으로 그 가정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처절하게 가난한 가정이 베푸는 사랑을 눈물겹게 받음으로 그들 가정을 진정으로 축복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이런 것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님들에게 축복된 기회가 되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가난하다고 슬러하지 마십시오. 기죽지 마십시오. 예수님도 가난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난에 머무르지는 마십시오. 가난을 정당화하거나 너무 선호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가 가난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부요해서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부요를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부요케 하기를 원하십니다.
가난하십니까?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십시오. 그 남아 있는 것을 양식으로 쓰지 말고 종자로 삼으십시오. 믿음으로 심고, 기대를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심으십시오. 이해가 안 되어도 말씀에 의지해서 심으십시오. 먼저 심은 후에 거둘 수 있습니다. 씨앗은 절대로 먹지 마십시오. 씨앗을 먹으면 재앙입니다. 극한 가난 중에도 믿음으로 심어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던 사르밧 과부처럼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풍요로운 축복을 누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