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롬1:16-17),김서년목사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트럼펫 소리와도 같이, 조용한 가운데서  강하게 울려 퍼지는 선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실로 위풍당당한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더없이 귀중한 복음적 선언인 동시에,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 자신의 복음적 간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든 크리스챤에게 있어서도 누구나 다 이렇게 간증하며, 또한 선언해야 할 그러한 내용인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것은 “내가 이렇게 믿노라”고 하는 선언입니다.   ‘내가’란 이 말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책에 그렇게 쓰여 있다’거나, ‘누가 그렇게 말하더라, 아무 게는 그렇게 믿더라’ 하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그러든지 간에 “나는 이렇게 믿는다”,  “내가 그렇게 믿는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는 우리 캄보디아의 친구 임소콩 내외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또 세례에 앞서 그 자신의 간증을 들었습니다만, 이 세례에 관하여 한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믿는 집안에서 시집온 며느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시집의 식구들을 전도하기 위해 애를 써왔고, 그 결과 드디어 시어머니께서 예수를 믿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세례를 위해 이제 목사님 앞에서 문답을 하게 됩니다.  별로 공부한 것이 없는 시어머니인지라,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신신당부를 합니다. “어머님, 목사님께서 분명히 ‘예수님께서 누구 죄 때문에 죽었느냐’고 물으실 것인데, 그러면 무조건 ‘내 죄 때문이라고’ 대답을 하세요.  내 죄 때문이라고!”
 아니나 다를까 세례문답을 하는데, 목사님께서 “예수님께서 누구 죄 때문에 죽었느냐”고 물으시거든요.  이 시어머니가 자신 있게 대답을 합니다.  “네, 우리 며느리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우리’라고 하는 표현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란 말은 1인칭 복수로서 분명히 ‘내’가 그 속에 포함된 말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바로 ‘나 자신’이 아니라 그보다는 좀 거리가 먼 것으로, 그래서 ‘우리’란 말로서 모호하게 고백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의 죄’ 때문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믿는다!’ 하는 이 고백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믿는다”,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시는데,  “이 복음”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복음’이란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복된 소식’이란 뜻인데, 이 말의 원래의 뜻은 ‘유앙겔리온’―‘기쁜 소식’이란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그 소식과 함께 전투하는 장면들을 실시간으로 TV를 통하여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가 못하였지 않습니까?  특히 옛날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들이 몇 달씩, 몇 년씩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그러니 전쟁에 이겼는지 졌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전쟁에 나간 남편이나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그 전쟁에 승리가 있으면, 그 승전의 소식을 가지고 전령이 오게 됩니다.  한시바삐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자 열심히 달려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라톤이라는 경기가 유래되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전령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높은 성문에 올라가서 승전보를 전합니다.  이 승전보에 군중은 환성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몇 시간이고 기뻐 뛰면서 축제를 벌이게 됩니다.  단 그 한마디! ― “우리는 이겼다!!” 하는 이 한마디의 소식이  이 같은 엄청난 감격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민족도 이 승전의 소식을 남달리 거국적으로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바로 8․15 해방의 소식이었지요.   일본의 소위 천황이란 자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할 때,  잘 들리지도 않는 라디오에 귀를 갖다 대고 들은 그 한마디 소리에 온 나라, 온 민족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목을 놓아 울고, 달포를 두고 일손을 놓을 만큼 기뻐했습니다.  교회의 종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총칼로 못 치게 하던 그 종! ― 정말 거침없이 열심히들 쳤습니다.  날마다 모여서 마음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보세요.  ‘기쁜 소식’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승리의 소식! ―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과 사탄을 이기는, 율법과 진노를 이기는 ‘승리의 소식’이자  동시에,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소식’입니다. 
 그런고로 생각해보세요.  기독교는 그래서 축제의 종교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곧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벅찬 감격과 기쁨에 사는 것입니다.  기쁨의 소식을 받고도 징징 울고 다닌다면,  이것 말이 되겠습니까?  복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징징 우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 믿는 자를 향하여 “기뻐하라. 나는 기뻐하노라!!”―감옥 속에서도, 매를 맞으면서도 말이지요.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소망이라고 하는 이것! ― 이 소망은 우리로 배고프지 않게 하며,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하여 줍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금 내가 당장 먹을 것이 없다고 해도  내일 모래면 나라가 해방되고,  풍부한 행복이 내게 있게 됩니다.  이것을 앞에 두고 지금 밥을 몇 끼 굶는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징징 울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금 몇 끼를 굶는다고 해도 나는 배가 부릅니다!  오히려 다가올 그 때를 생각하며,  지금부터 싱글벙글 웃지 않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래서 환란 속에서도 참으며, 오히려 소망으로 인하여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이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인 것입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볼 때에는 예수님의 생애!―그 모든 것이 다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병 고치시고, 말씀하시고, 이적을 행하신 것;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 부활하신 것;  그리고 승천하시고 이제 재림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런 것을 다 종합해서 ‘예수 복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십자가와 부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보아야할 아주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여러분, 객관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예수의 십자가 사건!’ ― 이것을 당시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을 것 같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것 하나뿐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라고 하는 ‘사형틀’, 그것밖에 못 봅니다.  ‘어떤 사람이 서른세 살의 나이에 골고다 언덕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더라!’하는 그것밖에 모릅니다.  당시의 로마 정치가들이 볼 때는 그렇습니다.  안 믿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런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눈으로 볼 때에도 그렇습니다.  불신앙의 사람에게는 그 하나밖에는 안보입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입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지요.  비참하게 죽었거든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부활했다고 하지만, 그런 것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고작해야 역사 위에 있었던  한 낱 어떤 한 사건일 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만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은 지금 바로 이 같은 문제를 앞에 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복음!―내가 믿는 이 복음은 생명이라고!―복음은 곧 구원이라고!’ ― 이렇게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있거든요!  그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로마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복음이 부끄럽습니다.  왜요?
   십자가는 저들에게 있어서는 부끄러운 것이거든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십자가란 죄수를 메달아 죽이는, 그것도 가장 악질적인 사형수들을 매달아 죽이던 사형틀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로마 시민권만 있으면, 그들이 어떤 잘못을 범하였다고 하더라도 십자가를 지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부끄럽게 여기던 그런 것이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에서 순교를 당할 때, 베드로는 바티칸 언덕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메 달려 죽었습니다.  안드레가 그러하였고, 나머지 대다수의 사도들도 다 십자가에 달려 죽던지, 불에 태워서 죽던지 그렇게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만은 같은 죄목이었지만, 칼로 목배임을 당하여 죽습니다.  왜 그랬던 것입니까?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래서 그 같은 극형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로마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  유대사람이요, 이방인이요, 야만인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의’고 ‘불의’고 가릴 것도 없이, 로마 당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저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그 한사람 잘못 죽였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재판 같은 것 아예 하지도 않았고, 그것도 새벽에 재판 비슷하게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곧바로 아침 9시에 못박아버렸어요!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이런 사건이었을 뿐입니다.

 이렇듯 부조리하고 모순된 재판과 처형으로 죽어간 한 사람의 모습!!  ―  로마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는 아주 부끄러워요.  특별히 십자가에 죽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벌거벗긴 채로 매달린 그 끔찍함!
   그래서 로마의 황실 기록에 보면, 적어도 식사할 때에는 절대로 십자가에 대해서 얘기하지 못하도록,  그저 ‘십자가’란 소리만 들어도 그 날은 식사를 하지를 못했습니다.  너무나도 끔찍하니까요!

 사도바울은 그래서 더욱 이 말씀을 하게 됩니다: “내가 복음을, 바로 이 십자가를 부끄러워 아니하노라!” 하고 말이지요!!


 또 하나, 로마 사람의 철학으로 볼 때에도 복음이 부끄럽습니다.
   일찍이 헬라의 철학이 로마의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지혜를 대표하는 헬라 철학이 무릎을 꿇고, 로마의 힘이 이긴 것입니다.  이 힘이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어요.  힘의 철학만이 통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8장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보고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시자,  빌라도가 “진리? 진리가 무엇이냐?” 하고 반문을 하지 않습니까?
   사실은 묻는 것이 아니지요.  비웃는 것입니다. ―― 이제 곧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게 되는 처지에 ‘진리’라니,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  ‘진리’라면 ‘승리’가 진리이지, 패하고도 무슨 진리냐?  이기고야 진리를 논하는 것이지, 이제 죽어 가는 놈이 무슨 진리를 말하느냐? ―― 바로 이런 얘기인 것입니다.
   로마 사람의 시각으로 보니, 예수의 십자가는 정말 부끄럽고 형편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당당하게 생각합니다.  “아니다. 나는 십자가 사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는 이 예수를 사랑한다.  이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 이것이 바울의 진실한 간증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직장에서나 어디에서나 언제든지 ‘I am Christian!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당당하게, 자랑스럽게 증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이 말에는 “내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 자신에게서 그런 당당함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자신은 결코 복음 앞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부름을 받은 이후로, 정말이지 진실하게 복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성도들을 향하여 권면을 했는데, 자기 자신부터가 복음에 합당하도록 살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만, 그 기도한 내용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 볼 때 스스로 부끄럽게 느낄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보면,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나는 결코 부끄럽지 않다, 담대하다’ 하시는 것입니다.  ‘떳떳하다’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대할 때에 나는 떳떳하다, 부끄럽지 않다,  이 거룩하고 놀라운 사랑 앞에 나는 부끄럽지 않다!!” ― 이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우리 모두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1장 8절에서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무슨 말인고 하면,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한편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 디모데를 보고 부끄러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믿음의 아버지는 감옥에 있고, 믿음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은 편안하게 지냅니다.  생각해보면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말씀합니다.  부끄러워하지 말라고요.  꼭 감옥에 들어와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서든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러면 되는 것이지, 부끄러워 할 것 없다!!

 이 말씀을 통해 ‘부끄러움’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감옥에 들어와 있고, 또는 밖에 있고’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일상의 삶에서 어떠하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그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매일의 삶을 통해 그만큼 복음에 합당하게 살았고, 그리스도 앞에 충성되게―진실하게 살았음을 말씀함인 것입니다.  부끄러워 아니할뿐더러, 나아가서는 자랑하고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특권으로 알고 있다, 영광으로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으로 바울은, 이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임을 선언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 이하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십자가 사건은)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 (곧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에게는 (십자가 사건은)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이지요(24절).  바울은 ‘유대사람들의 욕구’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로 이해하면 다 채워지고, ‘헬라 사람들의 지혜를 구하는 마음’도 십자가만이 충분하게 채워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16절 끝에 가서보면,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불교의 승려였던 사람이 나중에 예수를 믿고 크리스챤이 된 사람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간증하시더군요.  사실 불교의 그 깨달음이라는 것! ― 얼마나 얻기가 힘든 것입니까? 

 불교의 교리를 간단히 말한다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고통이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욕심’이 있기 때문인데, ‘고통(苦痛)’이란 것은 우리 밖에 있는 실상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대신에 우리 속에 있는 이 ‘욕(慾)’을 제어한다면, 인간에게 있는 ‘고(苦)’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번 솔직하게 생각해 보세요.  말은 쉽습니다만 이 “욕”의 문제! ― 사실 얼마나 제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까?
   그래서 평생 동안 벽을 바라보며 참선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고행을 통해서, 그래서 손가락에 기름을 발라 불태워 공양을 드리기까지 함으로써 이 ‘욕’을 제어하려고 하며, 그래서 소위 ‘깨달음’이란 것을 얻기 위해 애쓰고들 있습니다.  그만큼 이루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해보면, 설혹 그것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자신에게는 무슨 ‘이룸―성취’가 있을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으로 많은 고민을 하여왔었다고 합니다.
   그러든 어느 날 부흥회를 하고 있는 어느 교회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기쁘게 찬송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서 자기도 모르게 예배당 안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분은 이렇게 확실하게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 동안은 그저 비우고 떨치려고만 애써왔었는데, 그 대신에 내 속에 그리스도로 채우고 믿고 나니, 모든 것이 자연히 해결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욕’의 문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니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그 어려운 고행이나 수행을 통해서도 해결 안 되던 그 모든 것들이 ‘다 자연히 되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히브리 종교적으로 표적을 구하는 욕구도 십자가 안에서 다 채워집니다.  지혜를 구하는 헬라적인 철학적 욕구도  십자가 속에서 만족하게 채워집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만이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그것도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율법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또한 당시의 헬라 철학의 모든 것에 있어서도 달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고로 바울은 말씀합니다.  유대 사람으로 보아도 십자가만이 그 율법적 욕구를 다 채울 수 있으며,  헬라 철학적으로 보더라도 그 많은 철학!―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없다.  말만 많고 머리만 복잡하다!  십자가!―곧 복음이 그 같은 욕구도 만족하게 채워준다는 것이지요.
 그런고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복음을 자랑한다.  복음으로 만족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나의 으뜸가는 영광이다, 특권이다!!” ― 이렇게 바울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헬라 철학은 추상적 진리로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구원을 설명하고 그렇게 구원을 전망합니다.  그러나 그 철학이 절대로 구원을 주지는 못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율법이라고 하는 것도 언뜻 보아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길이다, 저것이 길이다’하고 말은 합니다만, 구원을 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오직 복음만이 율법적이 문제도 해결해 주는 것이다.  오직 복음만이 윤리적, 도덕적, 철학적 문제도 그 해답을 주는 것이다.  그런고로 복음은 능력이다.  복음은 철학이 아니요, 윤리가 아니요,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이것은 능력이다!”
   바로 이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뒤나미스―능력, power’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역사를 말씀함입니다.  구체적인 것입니다.  행동을 말씀함입니다.  생명력을 말씀함입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구원의 능력으로 체험할 수 있어야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복음을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내가 자유함을 느껴야 됩니다.  그렇게 속박되어 있던 자가 막 쇠사슬에서 풀린 듯이 풀리고,  안개가 걷히듯이 마음이 시원해지는 이 자유함, 이 구원 말입니다!
   영적으로 죽어 가는 사람이 고생고생 하다가, 복음을 바로 이해하게 되는 순간―복음을 바로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에,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다시 만납시다”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만날 수 있는 자유함!! ――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이 주는 ‘구원의 능력’인 것입니다!!

 복음에는 두 가지 능력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먼저는 ‘죽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를 죽이고, 교만을 죽이고, 위선을 죽이고, 거짓을 죽이고, 세속적 욕망을 죽입니다.  그런 것들이 다 사라져버려요!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헛된 욕망! ― 다 사라집니다.  욕심, 시기, 질투가 어느 결에 없어졌는지, 나도 모르게 다 없어져요!!――이게 바로 복음의 ‘죽이는 능력’입니다.

 그런가하면 또 하나, ‘살리는 능력’이 있어요.  그래서 은혜 안에 내가 살아납니다.  존재 의미가 살아납니다.  삶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가치관이 살아납니다.  하루하루의 생의 보람과 그 뜻이 살아납니다.
   복음에는 이렇게 살리는 생명력이 있어요.  죽이는 능력―살리는 능력이  동시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에는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은 복음을 능력으로 체험하고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려오고 내 가슴에 사무칠 때에,   나도 모르게 미워하던 사람을 사랑하게도 되고, 용서하게도 되고, 죄를 이기게도 되고,  사특함도 이기게 되고, 세속적 욕망도 이기게 되십니까?
 그리고 모든 두려움! ―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그 모든 두려움이 깨끗이 사라지고,  오직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그 말씀이 귀에 들려오십니까? 
 그렇다면, 이는 바로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이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추상적 진리가 아닙니다.  구체적 능력입니다.  복음은 생명력입니다.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또한 ‘나의 구세주’로 영접한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것을 믿는 자에게 그 같은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곧 충성입니다.  믿음은 진실입니다. 신앙입니다. 전적인 수락입니다.  믿음은 전적인 의지이며, 전적인 위탁입니다.  그러할 때, 이 같은 능력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이미 십자가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 안에서, 예수의 십자가가 주시는 그 능력, 그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 ― 이 능력으로 인해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말씀처럼, 승리하는 믿음의 생활로 더욱 진군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