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전천후 축복

 

시편 1:1-6,김영준목사

옛날에 유행했던 노래 중에 ‘건넛마을 최진사댁에’ 라는 곡이 있었습니다. 최진사에게 딸이 셋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셋째 따님이 제일 예쁘다고 소문이 나서 주인공이 직접 최진사를 찾아뵙고 천하에 제일가는 사윗감이 왔으니 셋째 따님을 나에게 달라 이렇게 해서 천신만고 끝에 그 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났더니 친구들이 하는 말이 먹쇠란 놈도 밤쇠란 놈도 나만 보면 일곱 개 복 중에서 하나가 맞았다고 놀려대었다 이러면서 노래가 끝납니다. 저는 이 일곱 개 복 중에서 하나가 맞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늘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칠복이라는 말을 검색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칠복은 칠난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가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칠난이 무엇인지 찾아봤더니 일곱 가지 재난을 말하는데 첫째는 해와 달의 운행이 도를 잃고 빛을 잃는 일월 실도난, 별걸 다 염려합니다. 둘째는 금성과 혜성이 변하는 성수 실도난, 셋째는 큰 불이 이는 재화난, 넷째는 홍수가 지는 우수 변이난, 다섯째는 태풍 부는 악풍난, 여섯째는 가뭄이 드는 항양난, 일곱째는 사방으로부터 적병과 도적이 일어나는 악적난을 일컫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곱 가지 재난이 없는 것이 일곱 개의 복이라는 얘기지요. 그러니까 먹쇠란 놈도 밤쇠란 놈도 일곱 개 복이 뭔지 모르고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다만 이 가사에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사람마다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운수가 있다는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복이 있고 저런 사람에게는 저런 복이 있고, 복을 다 받는 사람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일곱 개 복중에서 하나가 맞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운수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신문에 오늘의 운세가 매일 올라오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운이라는 것은 믿습니다. 저는 좀 희한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믿지 않고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에게 당신은 운이 없다고 하면 굉장히 싫어하고 당신은 운이 있다 그러면 좋아합니다. 오죽하면 강아지 이름을 럭키라고 짓겠습니까. 럭키, 운이 좋다는 말입니다. 러키세븐이라고 해서 일곱은 운이 좋은 숫자이고 그리고 열 셋은 운이 나쁘고-서양에서- 4 자가 동양에서는 운이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특별히 8이라는 숫자가 운이 좋다고 생각해서 이번 베이징 올림픽 개막일이 2008년 8월 8일 오후 8시였습니다. 그게 우연한 게 아닙니다. 얼마나 중국 사람들이 미신적이면 첨단의 기술과 경제를 자랑하는 국가마저도 좋은 게 좋은 거다 라고 가장 운수가 좋다고 생각하는 날짜를 택해서 올림픽을 개막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읽어보면 운 이라는 개념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운이 좋은 사람도 등장하지 않고 운이 나쁜 사람도 등장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운이 좋은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복을 받은 사람은 운이 좋아서 복을 받은 게 아니고 벌을 받은 사람도 운이 나빠서 벌을 받은 게 아닙니다.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운수가 아니고 하나님이에요. 그것을 성경이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전혀 미신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이것을 주목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것과 인류의 운명을 움직이는 것은 운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성립하는 것이고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사는 것, 이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그 이외의 운을 좋게 하는 어떤 기술이라든가 어떤 것도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특별히 운이 좋은 날짜나 시간이 없습니다. everyday is a good day. 모든 날은 다 좋은 날입니다. 찬양가사에 ‘이 날은 이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이 곡은 특별한 날 부르는 곡이 아닙니다. 어느 날 어느 시간에 불러도 됩니다. ‘이 날은 이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혹시 오늘은 일진이 안좋다 라고 생각되는 날은 의도적으로 믿음으로 그 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이 날은 이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어느 날도 운이 나쁜 날이 없고 모든 날은 좋을 수 있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에 태어났느냐 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언제, 무슨 띠로 태어났느냐, 무슨 별자리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은 이방인이나 염려하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의 여부와 하나님의 섭리에 좌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났다고 해서 어떤 불가항력적인 운명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믿음의 여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았느냐,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느냐,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느냐, 거기에 그들의 삶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띠라든가 별자리라든가 이런 것을 염려하는 사람은 이방인이나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운이 좋은 장소도 없습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찾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더라도 하나님이 그곳에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내가 어디에 가느냐 하는 것은 별로 염려할 것이 아닙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니까 하란의 외삼촌 집에 가니까 외삼촌이 복을 받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니까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갔을 때 보디발이 복을 받고 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니까 감옥이 복을 받고 나중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니까 애굽이 복을 받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는다면 내가 어디에 가고 어디에서 일하고 누구 밑에서 일하고 내 지위가 어떻고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떤 일을 맡았든지 누구 밑에서 일하든지 내 지위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주실 것이요 나를 통하여 그 일과 그 직장과 그 장소와 내가 섬기는 사람들에게도 복을 주실 줄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담대한 믿음이에요. 아무렴 어떻습니까. 다윗이 사울 왕 밑에서 섬길 때 사울 왕이 그를 시기하고 미워해서 죽이려고 여러 번 애를 썼지만 죽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내가 어디에 있느냐 내가 어디를 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더라도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오히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어보면 야곱은 벧엘에서 돌베개를 하고 자다가 꿈에 하나님을 뵙고 그리고 그 장소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지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벧엘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벧’은 집, ‘엘’은 하나님, 그래서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장소의 이름이 원래 벧엘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기서 나타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거기서 나타나셨기 때문에 이름이 벧엘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먼저이고 그리고 나서 그 장소의 이름이든 속성이든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곳을 골고다라고 불렀습니다. 그건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그 바위의 모습이 해골같이 생겼기 때문에. 얼마나 무서운 곳입니까. 대대로 사형집행 장소입니다. 무서운 곳입니다. 사람 죽이는 곳입니다. 시쳇말로 하면 아주 재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거기에서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수 없는 장소가 기독교 신앙의 최고의 성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소가 어떤 장소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누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느냐 하는 것이 그 장소의 성격을 바꿔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 서편에서 양을 치다가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에게는 운이 좋은 장소도 없고 운이 나쁜 장소도 없고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내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염려할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이나 염려하는 것입니다. 빈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그리고 특별히 운이 좋은 물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참 내지는 탈리즈만이라고 해서 복을 가져다주는 물건들을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적이라든가 그게 십자가 목걸이일수도 베넷저고리일수도 있고 황금돼지일수도 있고 황금박쥐일수도 있고.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는 그런 것이 전혀,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2계명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속에 있는 것 어느 형상도 만들지 말고 어느 것도 섬기지 말고 거기에 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물건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건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어느 아이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자기 사환에게 자기 지팡이를 들고 가서 그 아이에게 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환이 엘리사의 지팡이를 들고 열심히 뛰어가서 병든 아이에게 얹었지만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기도와 사람의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가 직접 가서 기도했더니 그 아이가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물건을 거룩하게 여기고 의지할까봐 어떤 물건도 거기에 효험이 있게 한다든가 거기에 능력이 있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을 때 나음을 입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그 옷을 입고 계셨기 때문이지, 만약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걸어놓으신 옷이었다든가 예수님이 달리셨던 십자가의 나뭇조각이라든가 예수님의 피를 담았던 잔이라든가 어떤 물건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거기에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신교는 예배당이 지극히 단순합니다. 어떤 특별한 물건을 걸어놓지 않습니다. 이 강대상은 제가 디자인해서 주문해서 만든 것이고 이 강단 인테리어는 인테리어 회사에서 디자인해서 만든 것이지 여기에 효험이 있는 어떤 물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제 차를 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제 차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 말은 십자가를 걸어놓지도 않았고 뭔가를 붙여놓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자동차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운전자의 조심스러운 운전과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는 것이지 거기에 더덕더덕 붙이면 그게 자동차를 사고로부터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확실하게 해야 됩니다.

사람의 운수를 좌우하는 프로파일링, 어떤 분류법도 옳지 않습니다. 관상 ․ 손금 ․ 사주 ․ 혈액형 ․ 별자리 ․ 띠 ․ 손바닥의 두께 ․ 귀의 모양새 ․ 두상 ․ 그 사람의 병력 ․ 과거, 이런 어떤 것을 가지고도 복이 있는 사람과 복이 없는 사람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적인 관점에서 재수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사람입니다. 과거에 일곱 귀신이 들렸다고 알려진 처녀에게 아들을 맡기겠습니까.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 평판이 좋지 않은 여자,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별로 재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 제일 먼저 예수님을 뵙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제일 먼저 전하는 영광을 안게 된 것입니다. 운명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또 삭개오는 직업이 재수 없습니다. 그 주변 사람들이 다 재수가 없습니다. 생긴 것이 재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제쳐놓고 삭개오를 부르시고 삭개오의 집에 찾아가시고 삭개오에게 구원이 너에게 임했다, 이렇게 선포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전천후 복입니다. 전천후라는 말은 어떤 기상에도 운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전천후 비행기. 당연히 비행기는 전천후 비행기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전천후 복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상황에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만약 구애받는다면 하나님이 아니지요. 인간의 상황에 구애를 받는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어떤 것에도 좌우 받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복 있는 사람의 조건을 아주 간단명료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시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성경은 운수를 가르치지 않고 운이 있는 시간이든 장소든 물건이든 이런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오직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과 올바른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러므로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유하게 하신 인간을 얽매는 것이 바로 불신이요 무지함이요 미신인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는 형통치 못할 시즌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황이면 불황의 시즌에도 열매를 맺습니다. 학생이면 학생의 시즌에 열매를 맺습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습니다. 그 시절에 합당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에게는 궁핍의 시즌이 없습니다. 모든 시즌에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그러니까 건넛마을 최진사댁의 노래 가사에는 일곱 개 복 중에서 하나만 맞았다고 했지만 복 있는 사람은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여러분, 아마 믿기 어려우실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아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설사 아직까지는 여러분의 경험이 그렇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건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거짓된 것이 아닙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할 줄 믿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재물 운이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식 운이 있고 이런 식으로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 자식이든 재물이든 건강이든 가정이든 어떤 것이든. 그 행사가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행사로 우리의 몫으로 지정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건 별개이지요. 무슨 말이냐면 복 있는 사람은 라스베이거스에 가도 형통하고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그건 그의 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몫이 아니에요. 복 있는 사람은 도둑질을 해도 형통하다, 그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이 그에게 정해주신 행사가 아닙니다. 그의 행사는 그에게 걸맞은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의인으로서 맞는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만약에 여러분이 형통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건 여러분의 행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걸맞지 않은 일에 욕심을 낸다면 그건 하나님이 책임지시지 않겠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적법하고 적정한 것은 하나님이 다 형통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고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악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비결은 하나님과 우리만이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만 알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