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58:8-12,양인순목사
남편에게 늘 핀잔만 주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무슨 이야기를 하거나
행동을 해도 늘 “당신이 뭘 알아요?” 하면서 대꾸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그만 죽게 되었습니다. 병원의
연락을 받고 영안실에 찾아간 아내는 남편의 시신 앞에서 서럽게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흰 천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남편이 깨어서 보니 아내가 대성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남편이 아내의 등을 두드리며 “여보. 나 죽지
않았어. 살았으니까 그만 울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아내가 남편을 쳐다보며 이렇게 소리쳤답니다. “당신이 뭘 알아요? 의사가
죽었다는데!”
우리 안에 잘못 형성된 습관이나 버릇을 고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3살 버릇 여든 까지 간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좋은 공부의 습관을 가져야 공부를 잘합니다. 신앙생활도 좋은 습관이 필요합니다. 주일이면 마땅히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주일성수의 습관이 중요합니다. 기왕 예배드리러 나올 거면 늦지 않게 일찍 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저희 교회도 보면 늦는 분은
항상 늦습니다.
자리에 앉는 것도 습관입니다. 기왕이면 앞자리부터 앉으면 좋겠는데 자기 앉는 자리가 정해져있습니다. 안내하시는 분들이
앞으로 가라고 하면 화를 내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아니고 저 강북에 있는 교회이야기입니다. 좀 늦게 오시는 분을 배려해서
앞자리에서부터, 그리고 의자 안쪽에서부터 앉아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도를 드리는 것도 좋은 습관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문제가 생겨야만 기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께 아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항상
기도하면 기도가 쉽습니다. 그러나 가끔하면 기도 줄이 잘 안 잡힙니다. 십분만 기도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자주 만나야 할 말이
많습니까? 오랜만에 만나야 할 말이 많습니까? 사랑하는 여인들은 매일 만나도 항상 시간이 모자랍니다. 들어보면 별 대단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말합니다. 그리고 헤어질 때면 안타까워서 야단입니다. 우리의 기도시간이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더 주님과
대화하고 싶은데 시간이 부족해서 아쉽지만 일어서야 하는 그 마음이라면 얼마나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찬양을 부를 때도 붕어처럼 립 씽크
하지 마시고 크게 부르시는 습관을 가지시면 좋습니다. 목소리를 높여 찬양하는 것을 주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음정 박자 좀 틀려도 괜찮습니다.
찬양대는 특별히 은사를 가지신 분들이 모여서 열심히 연습해서 부르는 것이니까 틀리면 좀 곤란하지만 회중석에 계신 여러분은 괜찮습니다. 목소리
높여서 기쁜 마음으로 찬양하시면 놀라운 은혜가 임합니다.
헌금을 드리는 것도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주일 날 헌금바구니 왔을
때 지갑 꺼내서 고민하지 마시고, 가급적이면 미리 준비하십시오. 토요일 날 준비하셔서 성경책에 끼워두셨다가 드리면 제일 좋고요, 아니면 주일 날
예배의 자리에 오셔서 기도하는 가운데 미리 준비하셨다가 드리세요. 단순히 물질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성과 믿음을 드리는
거잖아요. 자녀들에게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미리 준비해서 정성껏 드리는 훈련을 어려서부터 시키세요. 그것이 축복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 예배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 앞에 칭찬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금식을 하면서도 삶에 변화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삶 속에는 오락을 구하고, 서로
다투고 논쟁하며 자기 소리를 높였습니다. 비록 음식을 먹지 않고 자신을 괴롭히며 열심히 금식을 했지만 형식적인 금식, 의식화된 금식, 하나님이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금식, 참된 예배자의 태도는 바로 부당하게 압제당하는 자들을 자유케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눠주고, 가난한 자를 집에 맞아드리고, 헐벗은 자를 입혀주고, 도움이 필요한 자를 향하여 숨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참된 금식과 예배의 모습은 삶의 태도가 바뀌는 것이요 삶 속에서 주님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임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 앞에 나와 거룩하신 주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이요 세상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보여주신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종말론적인 삶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의 종말론적 삶의 태도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주님 나라가 완성될 때
천국잔치에 들어갈 자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양의 자리에 서는 자들은 천국백성이요 염소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심판을 받아 지옥 갈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갈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35-40)
우리의 삶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고 대접한 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고 대접한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반대로 왼편에 염소에 자리에 선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언제 우리가 주님을 그렇게 대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때 주님은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전에 모여서 감동적인 예배를
드렸다할지라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가난한 자, 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갇힌 자를 외면한다면 주님과 아무 상관없는 예배요, 주님을
무시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결국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와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로 연결될 때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지난 주 3가지 제안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자랑할 일도
아닙니다. 마땅히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행하지 못했던 것들입니다. 새해 두 주간 새벽을 깨우며 한 끼씩 금식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동참하고 계신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금식하다 실패하셨어도 다시 시도해 보십시오. 아직 시도조차 하지 않으셨다면 한번 시작해 보십시오. 한 끼의 금식한 식대를 계산해서
사랑의 눈뜨기 헌금으로 드려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대접하는 작은 실천입니다.
나는 죽어도 금식은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몸으로 봉사해 보십시오. 20일 목요일 오후 2시에 사랑의 연탄을 나눕니다. 3층에 신청서를 붙여놓았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신청하십시오.
그리고 신생아 살리기-모자뜨기 캠페인에도 참여해 보십시오. 3월 6일까지입니다. 가로 35cm, 세로 15cm
크기로 떠서 내주시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와 말리 그리고 네팔로 보내집니다. 어제 제 아내가 모자 한 개를 완성해서 사진을 찍어 문자를 제게
전송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 모자를 누가 쓸까 가슴이 설랬습니다. 저도 이번 주부터 도전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주님의 평화가 임합니다. 주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떼제 공동체에서 항상
부르는 주제 찬양이 있습니다.
♫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
(Ubi caritas et amor, ubi
caritas Deus ibi est!)
사랑의 나눔이 있는 예배, 사랑의 나눔이 있는 삶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놀라운 기적이 임합니다. 우리가 기대하지 못하는 풍성한 축복이 임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리하면” 이라는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과 예배의 삶으로 살아간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이런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축복의 핵심 내용이 바로 주제성구인
58:11절입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아멘!
여기서 ‘물 댄 동산’은 하나님이 주시는 총체적인 샬롬, 축복의 삶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물이 귀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사방에 물을 볼 수 있는 나라는 드뭅니다. 산에 물을 주지 않아도 나무가 자라는 나라는 복 받은 나라입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축복받은 나라인가를 실감했습니다.
중동지역은 어디를 가도 거친 광야요 사막입니다. 나무나 푸른 초원을 구경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하늘에서 물을
내려주지 않으면 농사도 짓지 못하고, 가축을 기를 수도 없습니다. 구약에 보면 우물 때문에 싸움이 나고, 전쟁이 벌어집니다. 앞으로도 물
부족으로 인한 물 전쟁의 가능성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참된 예배자의 삶을 회복하면 물이 끊어지지 않는 물
댄 동산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물 댄’의 의미는 ‘흠뻑 젖은 혹은 관개시설이 잘 된’의 뜻입니다. ‘동산’이란 단어에는 히브리어 ‘간(gan)’이 쓰였는데요
원래 의미는 ‘울타리가 쳐진 정원’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에스겔 28:13절에서 ‘하나님의 동산 에덴’을 의미합니다.
에덴 동산은
강물이 흘러나오는 근원입니다.(창2:10) 비손과 기혼과 힛데겔과 유브라데의 강줄기가 바로 에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에덴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에덴은 물의 근원입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물은 생명이요, 사랑입니다. 물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예배자의 삶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물은 무색무취입니다. 자기를 들어내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물은 자기를 희생하여 목마름을 해결해줍니다. 물은 자신이
더러워짐으로 다른 것을 깨끗하게 합니다. 물은 자기를 주장하거나 고집하지 않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질서를 거스르지
않습니다. 항상 주어진 상황에 묵묵히 순응합니다. 물은 자기 희생적 속성을 보여줍니다. 물은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 주님은 죄 가운데 신음하는 인류를 살리시려고 거룩한 희생, 거룩한 낭비를 하셨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십자가의 보혈이 사랑의 강물이 되어 흐르는 곳마다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절망 가운데 있던 자들이 소망을
갖습니다. 탄식하던 자들이 새 노래를 부릅니다. 가난한 자가 부요하게 되고, 멸시받고 천대받던 자들이 높임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는 곳에는 사랑의 강물이 흐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지 공동체 안에 예배가 회복되면 에덴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서로가 물처럼 자기희생을 통해 사랑을 흐르게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교회의
재정을 아낌없이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먹고 쓰는 것은 줄여야 합니다. 최대한으로 절약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녀를
키워보시면 압니다. 두 자녀가 있는데 형은 경제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돈도 잘 법니다. 그런데 동생은 경제적 능력이 없습니다. 같은 뱃 속에서
나왔는데 형은 잘 살고, 하나는 못 살면 부모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런데 형이 자기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돈을 쓰는데 동생에게는 인색합니다.
그러면 부모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그럴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셨는데 그것을 가지고 나
자신만을 위해, 자기 가족만을 위해 쓴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가난하고 약한 자의 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끼리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면 과연 하나님이 그 가정, 그 교회를 기뻐하실까요?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주고 또 주어도 기뻐하듯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사랑의 강물을 세상으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의 손을 세상을
향해 사랑의 손길로 활짝 펴야 합니다. 그 사랑의 강물이 흐르는 곳에 죽었던 자가 살아나고, 낙심한 자들이 새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신앙의 긍극적인 목적은 에덴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죄로 파괴된 삶의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예배의 삶을 통하여 에덴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물 댄 동산, 즉 에덴의 축복이 무엇인가를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항상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예배의 삶이 회복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항상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곁길로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의 인도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고집, 경험, 지식을 따라서 움직이려고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의 계획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과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이 다릅니다.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선택합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좇고자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물이 풍성해보이고, 기름져 보이는 땅, 그러나 그 땅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래바람 부는 언덕뿐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 때 어디로 가든지 인도하셨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순례 길에도 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그 유혹을 물리치는 힘이 무엇일까요? 바로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내게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삶 속에서 순간순간 그 말씀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나를
유혹하는 순간 진리의 말씀이 떠오르면 이길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혈기가 올라올 때, 주님의 사랑의 말씀이 떠오르면 진정할 수 있습니다. 내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용서의 자리로 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 귀에 진리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해야 합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16:18-11). 주님이 내 안에 계실 때 능력의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지켜주십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치 못하도록 지켜주십니다. 우리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보호해주십니다.
이것을 깨닫고 산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항상 주님을 높이며 찬양하는 예배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항상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나갔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오히려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며 감사로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 삶 가운데 예배가 회복되면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올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일터와 사업을 든든히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지교회를 반석 같은 믿음 위에 아름답게 세우시고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주님과 동행함으로 임마누엘의 은총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는 축복입니다.
참된 예배가 회복되면
그곳이 바로 물댄 동산 에덴이 됩니다.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곳에는 천국이 이뤄집니다.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만 가는 아름다운
곳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의 초림과 더불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임했습니다. 천국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주권의 개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천국이 어디 있습니까? 물었을 때에 ‘너의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주님을
예배하는 삶의 자리에 이미 천국이 관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결코 다툼이나 논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배의 자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자리입니다. 예배의 자리는
에덴동산이요 천국이 임하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찬송이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사랑이 넘치고, 축복이 넘치는 곳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없고, 세상에서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성지교회 안에서 느껴야 합니다. 이 놀라운 체험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입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시간마다 천국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기 전에는 마음이 무겁고, 힘들고, 지쳐있다가도 예배를 드리고 성전을 나가는 순간 새 힘을
얻고, 기쁨과 감격으로 성전을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우리가 받은 기쁨과 감격을 사랑의 삶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물댄
동산의 축복, 내 영혼의 만족을
누리며 사는 천국 백성의 모습입니다. 이 예배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통해 여러분의 문제가 응답되기를 축복합니다. 눌린 자가 자유케 되고,
지쳐있는 자들이 독수리 날개쳐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영혼이 만족함을 얻어
주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기쁨과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는,
뼈를 견고케 하시는 축복입니다.
참된 예배가 회복되면
뼈가 견고케 됩니다. 이 말씀은 건강의 복을 상징합니다. 요한 삼서이절에도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면 영혼이 잘 됩니다.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형통케 됩니다. 그리고 강건케
하시는 축복을 주십니다.
요즘 신문에 특집으로 노령화 사회에 대한 문제를 계속 제기하고 있습니다. 서울대 의대 교수로서 장수학에 대해서 연구하는 박상철
교수의 특집 기사를 봤습니다. 요즘은 늙는 것을 싫어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노화되는 것은 창조주의 섭리일
뿐만 아니라 자기를 지켜 나가는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젊은 사람이 암이 걸리면 더 빨리 확산되어 죽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암이 걸려도 확산 속도가 느려집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늙는다는 것을 미워하지 말고, 웰
에이징(well-aging) 나이를 잘 먹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장수하는 비결로 잘 먹기, 잘 움직이기, 잘 어울리기, 잘 함께
하기를 말합니다. 이제는 잘 먹고, 잘 운동하는 것은 걱정 안해도 되는데 어울리고 함께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좋은 인간관계가 중요한데 그것이 끊어질 때 가장 비극적인 노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수하는 마을이나 공동체를 보면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소리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으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케 하시는 축복이 있음을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셔서 9988234하시기 바랍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사시다가 2-3일 앓다가 천국 가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2011년 우리 성지가족 모두 참된 예배자로 거듭나고,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격을 회복하고, 세상에 나아가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힘써 베풀고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복의 근원이 되어서 물댄 동산 같은 가정, 물 댄 동산 같은 은혜가 넘치는 교회를 이루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 사랑의 기적이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