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베개에 누워 자는 인생
본문 - 창세기 28:10-19
안효관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삶에 있어서 견디기 힘든 어려움에 봉착한 야곱이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147년의 세월을 살았던 야곱의 인생 가운데 가장 힘든 때였고, 또 평생 잊지 못한 은혜를 체험했던 때가 바로 이 때입니다. 창세기 48장에 보면, 야곱이 죽기 직전에 요셉에게 오늘 본문의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이 때 체험했던 하나님의 축복을 평생 가슴에 품고 있었음을 회상하고 있는 장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에서 야곱이 어떤 신세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인생에 어떤 분으로서 역사하셨는가를 살펴봄으로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야곱이 처한 상황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지금 도망자의 신세입니다. 여러분, 「터미네이터」(Terminator)란 영화를 보셨습니까? ‘터미네이터’ 는 말은 ‘처단자’라는 뜻입니다. 영화에 보면 주인공은 터미네이터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 됩니다. 터미네이터는 인조인간이기 때문에, 사람이 힘으로썬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총으로도 치명상을 입힐 수가 없습니다. 이 터미네이터는 처단하도록 한 번 지시받은 사람은 끝까지 쫓아다닙니다. 폭발물로 폭파를 시켜도 뼈대만 남은 인조인간 터미네이터는 계속 쫓아옵니다. 허리를 부둥켜안고 자폭을 해도 상반신만 남은 모습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쫓아옵니다. 마지막 동작을 멈출 때까지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쫓아옵니다. 터미네이터에게 쫓겨 다니기에 도망자는 항상 촉각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그 극심한 공포와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쫓고 쫓기는 숨 막히는 상황은 계속됩니다.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잠시도 긴장을 풀지 못하게 합니다. 물론 이 영화는 미국 상업주의가 만들어 낸 오락 영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에서, 무엇인가에 쫓기며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야곱은 하란으로 가고 있습니다. 야곱이 왜 하란으로 가는 것입니까? 28:1-2절에 보면, 아버지 이삭이 아들 야곱을 하란으로 보낸 것은 성별된 결혼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형 에서의 손길을 피해서, 급히 도망쳐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만이 받을 수 있는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필사적으로 도망쳤습니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잔뜩 화가 나 있는 형 에서의 낯을 피해서 그는 걷고 또 걸었습니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져 갔습니다. 이젠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만큼 아주 깜깜해져 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길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외투로 이불을 삼고, 돌로 베개를 삼아 잠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야곱의 모습은 영락없이 도망자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깊은 不安 속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피곤에 지친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누웠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는 너무나도 생생한 꿈을 꾸게 됩니다. 야곱이 생생한 꿈을 꾸었다는 것은 그가 깊은 불안 속에서 잠을 청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꿈이 있습니까? 만일 그런 꿈이 있다면 그건 그 꿈을 꿀 때 어려분의 상황이 굉장히 힘들었거나 불안할 때입니다. 보통 평안히 잠을 잘 때에는 꿈을 꾸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잠자리가 불편할 때, 몸이 아프거나, 심기가 불편할 때, 우리는 잠을 설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때 꾼 꿈은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야곱의 꿈이 너무나도 생생했던 것은 그가 극도로 불안한 상태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이 불안 속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로, 야곱은 쫓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형 에서가 어떤 사람입니까? 창세기 25:27절에 에서를 “익숙한 사냥꾼”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짐승의 발자국만으로도 동물을 추적할 줄 아는 사냥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날렵한 산짐승을 죽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입니다. 지금 야곱은 이 능숙한 사냥꾼의 추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지쳐 쓰러져 잠이 든 이곳 루스는 고향 브엘세바에서 200리 이상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는 형 에서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서 하루 만에 그 먼 길을 도망쳐 온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능숙한 사냥꾼인 형 에서가 그의 뒤를 쫓아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로, 야곱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교묘한 방법으로 속여서,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형이 사냥을 간 사이에 어머니와 짜고서 에서처럼 꾸미고 앞을 보지 못한 아버지를 속여 자신을 에서라고 하고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챈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형 앞에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죄책감 때문에,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셋째로, 야곱이 잠든 곳은 낯선 땅이었기 때문에 불안한 가운데 잠을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이 살던 고향 브엘세바는 평지였습니다. 반면에 벧엘은 가파른 산들로 둘러싸인 산악지역입니다. 그는 아무런 방비 없이 위험에 노출된 채 그 험악한 산악지역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이 낯선 환경은 야곱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야곱은 능숙한 사냥꾼 에서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습니다. 낯선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극도의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불안한 잠을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불안한 상태에서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야 했습니다. 여러분! 돌을 베고 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 중에 집에서 주무실 때 울퉁불퉁한 돌을 베고 주무시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누가 집에서 그런 돌을 베고 자겠습니까? 집에서는 아무도 돌을 베고 자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잤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그가 척박한 현실에 내던져졌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호받을 수 없는 광야와 같은 척박한 현실 속에 던져져 고독한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 척박한 현실에 내던져졌습니다. 고향에 있을 때에는 언제나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곱게 곱게 자라던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곁에는 언제나 그를 감싸주던 어머니 리브가도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 곁에 없습니다. 그는 돌로 베개를 삼고, 차디찬 바닥에 홀로 누워 잠들었습니다. 그의 주위엔 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를 도와 줄 사람도 없습니다.

  이 야곱의 초라한 모습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대인은 도망자들입니다. 학생들은 공부에 쫓기며 살아갑니다. 사업가들은 불경기와 빚에 쫓기며 살아갑니다. 직장인들은 승진과 발령에 쫓기며 살아갑니다. 주부들은 분주함과 무의미한 일들에 쫓기며 살아갑니다. 청년들은 직장을 잡기 위해서 쫓기듯 불안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늘 우리를 추격하는 갖가지 무시무시한 에서로부터 쫓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몹시 두렵고, 긴장하며, 불안해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더욱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인생 문제를 아무도 대신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아무리 유능한 부모라도 자녀의 공부 문제를 대신해 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업의 문제, 직장의 문제, 가정의 문제를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저마다 홀로 서서 자신의 상황과 맞서 싸워야 하는 외로운 투쟁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이 인생의 고독한 투쟁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불안하고 고독한 우리의 인생에서 승리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꿈꾸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꿈이 우리를 승리자로 세워줍니다. 야곱은 어떤 꿈을 꾸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은 돌베개 위에서 잠을 자면서 세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극도로 불안한 가운데서 야곱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이 앞으로 전개될 숱한 어려움과 고생의 길에서 낙심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었고, 이삭이 순종의 사람이었다면, 야곱은 그의 아들 요셉과 마찬가지로 꿈을 꾸는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돌베개 위에서 세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여러분도 야곱처럼 세 가지 꿈을 여러분의 가슴에 간직하셔서 힘들고 외로운 인생길에서 승리하며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로, 사닥다리의 꿈입니다.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야곱은 꿈속에서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그 사닥다리는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천사들이 그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사닥다리가 하늘 꼭대기까지 닿았다’는 것은, 우리가 척박한 현실에 내던져진 바로 그 곳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온갖 무시무시한 에서로부터 쫓기다가 지쳐 쓰러진 바로 그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이 힘들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어 답답하고 불안할 때 하늘 꼭대기까지 닿아 있는 사닥다리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의 자리가 된다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그래서 사방이 모두 막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하늘은 언제나 열려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 하늘을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에는 언제나 길이 열려 있습니다. 하늘 꼭대기까지 닿아 있는 사닥다리가 있습니다.
  그 사닥다리 위에는 하나님의 천사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언제나 출정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사닥다리 위해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힘들 때 하늘의 하나님을 쳐다보면 위로를 얻을 수 있고 힘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려고 사자를 보내십니다. 그러기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불안해하지 말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야곱은 임마누엘의 꿈을 꾸었습니다. 15절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는 절대로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형 에서를 피해 도망쳐 왔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익숙한 사냥꾼이 형이 언제 큰 칼을 빼들고서 자신 앞에 나타날지 모르는 두려운 상황입니다. 야곱은 그런 두렵고 불안에 떨고 있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꿈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지켜주겠다.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의 안전을 지켜주시겠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신다면 누가 나를 두렵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방패와 산성이 되신다면 우리에게는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택하신 백성들에게 임마누엘을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왜 야곱과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가 도덕적으로 순결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어떤 큰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임마누엘을 약속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속이는 자였습니다. 형도 속였고, 아버지도 속였습니다. 지금 속인 대가로 벌을 받아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임마누엘의 은총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임마누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은총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오래 전 남극 탐험을 떠났던 영국의 탐험대원들이 혹독한 추위와 극도의 피로로 인해 거의 절망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상하게도 그들 대원의 숫자보다 늘 한 사람이 더 있다는 환상을 끊임없이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그들 곁에 늘 함께 있었던 그 한 사람의 환상 때문에, 죽음의 절망을 딛고 남극탐험에 성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탐험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그들 외에 항상 함께 있었던 그 한 사람에 대한 이상한 체험에 대해 고백했습니다. 바로 이 간증에 깊은 감명을 받은 T.S. 엘리어트(Eliot)라는 시인은 그의 대표적인 시 ‘荒蕪地’(The Waste Land)(1922)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항상 당신 옆에서 걷고 있는 제 삼자는 누구인가요?
   세어보면 언제나 당신과 나 둘 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내다보면
   당신 곁엔 언제나 또 한 사람이
   갈색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고 있네.
   두건을 쓰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당신 곁에 서 있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은 인생길은 항상 부족과 결핍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면 항상 당황할 수밖에 없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길에는 언제나 불안과 절망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거친 황무지에도 꽃이 피고, 메마른 사막에서도 푸른 강물이 흘러넘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떠한 에서에게 쫓기고 있습니까? 어떤 인생의 역경이 여러분을 절망에 몰아넣고 있습니까? 어떤 역경 가운데 있든지 야곱에게 임했던 임마누엘의 은총이 여러분들에게도 충만히 임하셔서, 인생의 모든 환란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기쁘게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야곱이 꾼 꿈은 언약의 꿈입니다. 본문 13절과 1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遍滿)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이 꿈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통해서 야곱에게 이어지는 꿈입니다. 이 꿈은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 안에서 수천 년 동안 꾸어왔던 원대한 꿈입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계속되어온 그 원대한 꿈을 반드시 이루어 주시겠다는 약속의 꿈입니다. 확실한 언약의 꿈입니다.

  아주 옛날 요단 계곡에 세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세 나무가 모여서 각자의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첫 번째 나무가 말했습니다.
  “나에겐 오랜 전부터 꿈이 있었지. 나는 여기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거기서 세공을 받는 하나님의 성전에 제단이 되었으면 해.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많은 사람들이 경배 드리러 와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될 거야.”
  이어서 두 번째 나무가 말합니다. “내 꿈은 사람들을 섬기는거야. 나는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범선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거야.”
  세 번째 나무도 자신의 꿈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여기 혼자 남아 있고 싶어. 그래서 높게 자란 나를 쳐다보는 사람마다 하늘까지 바라보며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싶어. 그리고 뜨거운 여름철에는 피곤한 길손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싶어.”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첫 번째 나무가 잘려졌습니다. 그 나무는 성전의 제단이 되리라는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을 깨어지고 베들레헴 어느 집 말구유가 되었습니다. 그 나무는 실망했습니다.
  곧이어 두 번째 나무도 베어졌습니다. 그 나무는 자기가 바라던 대로 배를 짓는 공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도 허무하게 깨어졌습니다. 조그만 고깃배가 되고 만 것입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가 바라던 대로 오랫동안 그 언덕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 역시 잘려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큰 죄인을 처형하는 세 개의 십자가 형틀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듣지 않고도 은혜로운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 나무는 사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나무는 보잘것없는 말구유가 되었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거룩한 밤 하늘에 별이 찬란할 때, 마리아가 메시아를 낳아 바로 그 구유에 누였습니다. 그 구유는 지금까지 그 어떤 성전도 얻지 못했던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고깃배가 된 두 번째 나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의 존재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원대한 꿈이 깨진 채 조그맣고 냄새나는 갈릴리의 고깃배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 작은 배에 오르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 한 마디로 그 배에 가득 차고도 넘치는 고기를 잡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갈릴리의 조그만 고깃배는 이 세상의 어떤 큰 범선보다 더 큰 영광과 기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편 십자가가 된 나무에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이 속죄를 다 이루시고 생명을 거두셨습니다. 이 땅의 어느 교회를 가나 그 나무의 모습을 본 딴 십자가가 걸려 있습니다. 그 나무는 죄의 수렁에서 구원을 열망하는 수많은 인생들에게 영생과 믿음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계곡에 서있던 세 그루의 평범한 나무들은 그 꿈들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실패한 것 같았으나, 참으로 거룩하고 영광이 넘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어떠한 고난이라도 극복하는 원대한 신앙의 꿈을 꾸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나의 짧은 생각으로 내 인생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냄새나는 말 먹이통이 되었다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비린내 나는 고깃배가 되었다고 체념하기도 합니다. 흉악범을 매다는 형틀이 되었다고 비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체념하거나 좌절할 수 없습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놀라운 언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원대한 꿈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 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꿈을 이루실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대한 신앙의 꿈을 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현실 앞에서 앞날이 막막할 때일수록 하늘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눈으로는 작아 보이고 실패한 것같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쓰시기 때문에 세상 그 어느 것보다 큰 꿈. 그러한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그 꿈은 극한 역경 속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줄 것입니다. 그 꿈이 있는 자리는 더 이상 평범한 루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벧엘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돌베개를 베고 자야 하는 불안의 땅 루스에서 하늘 꼭대기까지 닿는 하늘의 꿈을 가지셔서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언제나 벧엘의 축복이 임하는 복된 자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