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과 겸손

 

 

다니엘4:1-12, 24-27 ,임현수목사

지난 번 장로 선거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남기신 분들은 마지막 3차 투표 에서 사퇴 하심으로 다른 분들이 먼저 선택 받을 수 있도록 도우신 분들 입니다. 축구에서도 골을 넣은 공격수가 조명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사실은 그 골을 넣도록 도와준 도움골을 준 어시스트가 어찌 보면 더 귀할 수 있습니다.

바르셀로나 리그에서만 71경기에서 74골을 넣을 정도로 세계적인 축구 선수 메시는(한 경기에서 5골)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이지만 그는 종종 어시스트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하면서 어시스트가 매력적이라고 고백 했습니다. 남을 돕고 배려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이런 말을 하다보면… 자기 일도 중요하지만 남의 일을 돌아 보는 것을 통해 더 큰 기쁨을 얻었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연상하게 됩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을 세워 주는 모습은 우리들의 삶을 아름답고 풍요 하게 만듭니다. 오늘은 성숙과 겸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숙의 과정에서 겸손이라는 영성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그당시 그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택 받게된 이유는 한마디로 겸손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왕으로 택함을 받았을 때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나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여러분 사울이 얼마나 겸손하였습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왕이 된 후 어느 날 부터 그는 교만해짐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있고, 재물이 많고, 지식이 있다고 해도, 교만 하면 버리십니다.
사울 왕의 결정적 잘못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를 왕의 권한을 가지고 행한 일이었습다. 이것이 교만 이었고 … 그것이 바로 하나님 눈 밖에 난 이유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성숙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빠지기 쉬운 것이 이 교만이라는 함정입니다.
교만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교만 이라는 함정에 빠져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때로 고통이라는 예방주사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학식도 많고 수 많은 사람들 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교만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겸손하였 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처럼 교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육체의 가시 때문이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는 불치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를 통해 교만의 병에 걸리지 않도 예방주사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자기는 교만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고후 12:7)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고난의 신비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들의 자녀 때문에, 남편과 아내 때문에, 물질로 인해, 학벌 등을 통해서 교만 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예방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를 귀히 여긴다고 하였다.
엘리 제사장이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할 때 자식들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였다
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

하나님은 자기를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위대한 대통령들을 보십시오. 세상의 저명한 과학자들을 보십시오!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니엘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 갔을 때 그의 나이가 약 18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다니엘 4장은 그의 나이가 53세일 때의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에서 약 35년간의 긴 기간 동안 포로생활로 보낸 후의 정황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바벨론의  왕이 느브갓네살이라는 왕이었습니다. (갓네살?)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은, 교만의 비극적 말로(末路)를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나무는 점점 자라서 그 높이가 하늘에까지 닿았고... 그 열매가 아주 많아서 온 세상 피조물의 먹거리가 되었고...’(4:20~21) 이처럼 큰 영화를 누리던 느부갓네 살 왕이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에게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뜯고, 이슬에 젖어 7년간 살 것을
꿈을 통해 보여주셨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25절)
꿈을 꾼 후 12달이 지난 어느날, 자기 업적에 도취된 느부갓네살이 혼자 중얼거립니다. 
“내가 세운 이 도성, 이 거대한 바빌론을 보아라! 나의 권세와 능력과 영화와 위엄이 그대로 나타나 있지 않느냐!” 
그러나 이 말이 입에서 채 떨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너에게 선언한다. 왕권이 너에게서 떠났다...” (31~32절)앗수르와 유다를 심판하는 회초리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 하셨다는 걸 모르고, 왕은 대제국 바빌로니아를 세운 것이 순전히 자기 능력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물론 느부갓네살은 찬란한 바벨론문화를 꽃피운 왕이요, 인재를 등용할 줄 아는 능력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자, 하나님은 꿈을 통해 경고하신대로 그를 치셨습니다. 7년이나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뜯어야하는, 비참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래야 교만해진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이 인간의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과, 누구든지 그의 뜻에 맞는 사람에게 나라를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25절下)

정신의학적으로 특이한 병 가운데 리캔트로피(Lycanthrophy)라는 병이 있는데, 자기를 짐승으로 착각하는 정신 착란증입니다. 의학 사전에 의하면 이 병에 걸리면 자기의 외모에 전혀 관심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손톱, 발톱, 머리카락이 길어도 상관하지 않으며 짐승처럼 소리 내고 기어 다니면서 짐승과 같은 음식들을 좋아하게 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바로 이 병에 걸린 것입니다. 왕이 하루는 왕궁 위에서 거닐며 자기가 10년 동안 지은 아름다운 궁전을 보며 자랑하고 자기에게 영광을 돌렸을 때 갑자기 그에게 심판이 임한 것 입니다. 그는 군사적인 전략가이고 정치적인 천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의 성공과 부를 자랑하고 있을 때 갑자기 지성이 사라지고 정신이 나가면서 7년 동안 잠정적으로 짐승과 같이 미친 상태로 지내게 된 것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성장하고, 성공하고, 축복 받고, 나름대로 전문가가 되고, 정상에 올라가고,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주어진 말씀을 통해서 인간이 짓기 쉬운 교만 이라는 죄에 빠지지 않으면서 건강하게 성숙 할 수 있는 길을 성서는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1.언제나 나를 높이지 말고 하나님을 높이십시오. 34절...

이런 말을 하면 나는 나를 높이지 않는다고 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사실 대다수의 인간은 조금만 성공하면 얼마나 교만해 지기가 쉬운지 모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에 힘이 들어가고, 자기가 뭔가 되었다고 착각합 니다. 그러나 일단 교만의 함정에 빠지면 사람은 누구든지 엄청난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것이 느부갓네살의 경험입니다. 그는 7년 동안 짐승처럼 살아야 하는 큰 댓가를 치릅니다. 그가 누리던 영화는 한 순간 사라지고 그는 사람에게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뜯고, 이슬에 젖어 7년간 비참하게 지냅니다.

내가 세운 도성, 내가 내가 내가… 나 나 나…. 하다가 그 말이 입에서 채 떨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낮추리라…. 
“느부갓네살 왕아, 너에게 선언한다. 왕권이 너에게서 떠났다...” (31~32절)
교만이 하늘을 찌르자, 하나님은 꿈을 통해 경고하신대로 그를 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래야 교만해진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이 인간의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과, 누구든지 그의 뜻에 맞는 사람에게 나라를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25절下)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나무는 베되, 뿌리는 남겨두셨습니다. 깨닫고 돌아오는 그 때를 위해서입니다. 그 때, 그루터기에서 새 순이 돋게 해, 전보다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이처럼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가장 큰 복(福)중 하나가 ‘깨닫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깨닫는데도 사람마다 유형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말씀을 보고 듣는 즉시, 믿어지고 깨달아지는 백부장과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지나 가신다는 소문만 들어도 깨달아, 눈이 떠진 바디매오 같은 사람! 매를 맞을 때 비로소 깨닫는… 큰 물고기 뱃속에들어 가서 죽을 고생을 한 후에 살아난 요나 같은 사람! 매를 맞을수록 완악해져서, 아무것도 못하도록 눕혀놔야 깨닫는, 오늘 본문의 느부갓네살 같은 사람! ...최악의 경우로, 이 땅에서는 깨닫지 못하고 ...

죽고 난 후에야 깨달은 <부자와 나사로>의 부자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사람입니까? 아무 것도 못하게 눕혀놓으시기 전에, 오랜 시간 연단 받기 전에 빨리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높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높이면 사람들도 나를 떠나갑니다.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들 곁에 있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내 주변에 사람이 없다면 ‘내가 교만하지 않았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교만이 하늘을 찌르던 느부갓네살 왕이 언제 정신을 차렸습니까? 
34절에, 하늘을 우러러보고서 ….정신을 되찾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만했던 왕이었지만, 그가 다시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 제 정신을 주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36절, 느부갓네살의 고백입니다. “내가 정신을 되찾았을 때에, 나의 명예와 위엄과 나라의 영화가 회복되었고, 나의 고문관들과 대신들이 나를 찾아왔으며, 나는 이전보다 더 큰 영예를 받으면서 왕위를 회복 하였노라.”
스스로를 높이려 하지 마십시오. 잘난 척하다가, 밑둥 잘린 나무처럼 고난과 부끄러움 당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부디 겸손함을 입으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더 아름답게, 더 귀하게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는 것이 진짜입니다. 하나님은 찬양 받기에 합당한 분 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 분이 나의 창조주 이십니다. 흙으로 만들어지고, 코로 숨쉬는 진흙과 같은 도울 힘이 없는 연약한 인생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요즘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의 기초이고, 인간을 위한 것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인간 숭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성공의 비결 가운데 하나로 social network을 말 하고human relationship을 강조합니다. .... 요즘 사람들networking 같은 말을 너무 좋아하며 중시합니다. (모든 리더쉽을 가르치는 책의 내용) 그러나 그런 인간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 우상이 된다면 하나님은 그것도 멸하실 것 입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러면 그 분의 시간에 그 분은 요셉처럼 우리를 높이시고, 다니엘처럼 하늘 높이 올리시고, 다윗같은 바닥인간도 가장 위대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어부 베드로를 사도가 되게 하시고, 핍박자 사울같은 사람도 성자 바울이 되게 하십니다.

은총이 승리하는 것 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고전4:7)라고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 짧은 말씀 속에서 은총의 교리 전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구 원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교만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 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 하심을 내 영혼이.....

2. 나를 낮추려하지 말고 상대방을 높여주십시오.

나를 높이려 해서도 안되지만 나를 낮추려해도 안 됩니다... 여러분 내가 나를 낮춘다는 것이 쉽다고 생각 하십니까? 결코 쉽지않습 니다. 그리고 그것은 겸손의 영성을 유지하는 지혜로운 방법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교만해지려는 깊은 죄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낮추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겸손한 척’ ‘거룩한 척’ ’착한 척’ 되지도 않을 것을 될 것 처럼 ‘척, 척, 척...’하다가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습니다. 


나를 나를 낮추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그 에너지를 가지고 남을 높여주고 세워 주는데 쏟으십시오. 남을 칭찬하는데 사용 하십시오. (칭찬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자연히 높여주십니다.

나를 낮추는 것이 소극적인 자세라면, 상대방을 높이는 것은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성경은 형제를 나보다 낫게 여기라 (빌2:3)하셨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형제에게 먼저 문안하고, 그를 먼저 존중하라 하셨습니다.

내 아내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높여 주십시오.

내 친구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그를 높여 주십시오.

내 목원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그를 귀히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나보다 잘 생겼습니다. 당신이 나보다 유능하십니다. 당신의 생각이 더 지혜롭습니다. 당신이 나보다 생각이 더 깊으십니다. 당신이 나보다 더 착한 사람입니다.

결국 죄란 자기 본위에서 생기게 되는 것인데,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자기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곧 교만의 죄입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5절에 보면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잠언 29장 23절에는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시편 101편 5절에 보면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지성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2절에 보면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좀 배워서 다른 사람보 다 그 방면에 아는 것이 많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 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식을 얻는 것도 하나님에 의해서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게 이처럼 지식을 주셨는데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까 하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적 재산권, 발명특허처럼...)

그리고 물질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재물을 누가 주셨습니까? 신명기 8장 18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고 했습니다. 재물 얻을 능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재물이 많다고 해서 교만할 수 있겠어요?

역대하 29장에 보면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 때문에 교만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인 지위에 대한 교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파사 나라 재상 하만이 교만해서 유대 사람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인사를 잘 안 한다고 그 사람과 그의 가족, 나아가서 온 유대인을 학살하려는 음모를 세웠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에는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해 놓은 기둥에 자기가 매달려 죽었습니다.     (지난 주3월 초 부림절 기간..하만의 쿠키..지금도 씹어 먹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교만해서 망했고…그 아들 벨사살 왕이 교만해서 천여 명의 고관 대작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쓰던 기명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메데와 파사의 연합군이 쳐들어와 벨사살 왕은 죽고 온 나라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교만하던 헤롯이 충에게 먹혀 죽은 것을 기억하십니까?

기독교 사상은 노예 사상이라고 비웃던 니체라는 철학자는 미쳐서 죽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의 히틀러가 이 니체의 초인간의 사상을 정치에 이용해서 독일 민족은 초인간적 민족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 습니다. 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반드시 망합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교역자들과 직분자들은 특별히 겸손해야만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성경에는 겸손에 대한 권면이 게속 됩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에 보면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고 했고, 잠언 16장 19절에 보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 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미가서 6장 8절에는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마태복음 11장 28∼29절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1절에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 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로마서 12장에서 ..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 각을 품지 말고 (겸손한 생각을 품으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 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도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라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삼덕을 말합니다. 지, 인, 용(지혜, 어진 것, 용기)입 니다. 성경에서는 제일 먼저 겸손을 가장 귀한 덕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가르친 것만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친히 겸손을 보여 주셨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친히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겸손의 도, 종의 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뿐 만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성육신의 지상 생활 전체가 겸손에 대한 산 교훈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 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겸손을 친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에 은혜의 이슬이 내립니다. 병은 비어 있어야 기름을 넣을 수가 있습니다. 겸손하게 빈 마음이라야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 넣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7장 15절에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지존무상하며(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소생)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구약의 모세도 겸손하며 온유했습니다. 신약의 바울은 자기는 죄인의 괴수이며, 모든 성도 가운데 지극히 작은 사 도보다 더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겸손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 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교만한 바리새인보다는 겸손한 세리가 더 사랑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성경은 말 합니다. 베들레헴 성지에 가면 예수님이 나셨다는 곳을 기념한 예배당이 있습니다. 큰 예배당인데 문은 아주 좁고 낮습니다.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데 그것도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려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도 먼저 배려하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겸손의 옷은 영예의 옷이 됩니다. '코'하고 '눈'이 싸웠답니다. 코가 말하길.. 너는 쑥 들어가고 볼품이 없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구나. 얼굴이 예쁜것은 내가 오뚝하게 나와서이다. 눈이 열을 받았습니다.

뭐야? 그래? 그렇다면 너 한번 당해 볼래? 눈은 코의 말에 눈을 감아 버렸지요. 그러자 넘어져 코가 깨지고 말았답니다. 솜으로 코를 막은 코는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지요. "지금까지 내가 냄새를 맡아 주어서 잘못된 것을 먹지 않아 건강하게 산 것도 모르고..." 눈은 냄새를 맡지 못하니까.. 오줌을 보리차인줄 알고 마시고, 대변으로 상추쌈을 먹었답니다. 교만은 너와 나를 망 칩니다. 천박한 비유라고요? 이것이 교만한 인간들의 싸우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은 겸손의 사람에게서 움직이십니다."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겸손과 높여짐은 동일 선상에 있으며, 떨어질 수 없는 관계요, 최고의 권위입니다. "너희 중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4)" 


하나님께서는 겸손자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다함이 없으신 은총을 베푸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성숙에 힘스셔야 합니다.

그러나 성숙의 과정에서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은 교만이라는 함정입니다.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는 늘 두 가지를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나를 높이지 말고 하나님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나를 낮추려 하지말고 남을 나보다 높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경외 할 줄 아는 경건한 백성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를 돌아 보십시오. 교만한 사람을 본받지 말고 겸손한 사람에게 배우십시오. 겸손하게 말하는 사람, 겸손한 태도가 몸에 벤 사람, 머리숙여 허리굽혀 인사하고 섬기는 모습, 우는자와 함께 울어주고 웃는 자와 함께 웃어주는 인간미 넘치는 겸손한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겸손한 장로님, 겸손한 권사님, 겸손한 집사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목장안에서도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십시오. 할 수 있으면 자기를 부인하고 남을 높여주고 칭찬해 주고 세워 주시기 바랍니다.

모일 때마다 사랑과 선행을 격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비엠이나 카카오 톡이나 문자 메시지 보낼 때나, 이멜이나 전화 한통 할 때도 이런 자세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사람이 가장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저자세를 배우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사모하십시오. ....우리 교회가 겸손한 성도들로 가득한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