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을 배우자
본 문 :
빌립보서2:1-1,최성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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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간에는 “겸손을 배우자”,
이런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겸손을 배우자”, “겸손을 배우자.”
교회에 왜 나와야
하나? 구원받은 성도가 교회에 왜 나와야 하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빼면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겸손을 배우러 온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빌립보서 2장 5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랬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이유 중의 하나가 뭐냐?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겸손함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그 예수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로 29절 상반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랬습니다. 이 마태복음 11장 28절로
29절,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가지고 저는 설교를 수도 없이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설교를 많이 들었고, 또 여러분 스스로도
설교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오면, 쉼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 앞에 오면, 죄의 짐, 질병의 짐, 가난의
짐, 죽음의 짐까지라도 벗을 수 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빼면 안 될 것이 뭐냐? 예수님 앞에 나오면, 겸손을 배울 수 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겸손을 배워야 한다.
그렇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배워야 할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 알아봄으로, 겸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고, 겸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눠주며, 베풀어주며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 속에
다툼이 없고, 전쟁이 없고,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고, 은혜가 있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예수님의
겸손
첫째로, “예수님의 겸손.”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자기 포기에서 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구세주이십니다. 죄가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나님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포기했습니다. 죄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구간에 태어나셨습니다. 말구유에 누워 계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을
보여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7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자기를 낮추시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의 모습으로 오셔서 사람들과 같이 계셨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힘이 세시지만 힘을 쓰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죄하실 수 있으시지만 정죄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사랑하셨습니다.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많은
무리들이 끌고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모세 율법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돌로 쳐죽이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을
시험하셨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그렇습니다. 얼마가 지나갔습니다. 여인에게
물어봅니다. “사람들이 있느냐?” “네, 예수님, 아무도 없습니다”(요 8:10-11). 예수님은 돌로 그 여인을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돌아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요 8:11)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당시에 죄가
없으시니까 정죄할 수 있습니다. 정죄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랑하셨습니다. 용서하셨습니다.
또 참된
겸손이란 예수님처럼 자유인이지만 종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요?
“서로서로 종노릇하라.” 가정에서 서로서로 종노릇하라.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우리 모두 가정에서, 구역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겸손의 본이 보이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사도 베드로가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3절입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겸손은 복종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이 자기 포기의 겸손이면,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복종의 겸손이다. 빌립보서 2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에는 누가 달려야 합니까? 죄인이 달리는
것입니다. 죄의 값으로 달리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거든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저주받을 자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셨습니다. 왜요?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원죄 때문에, 자범죄 때문에, 우리, 나의 죄, 너의 죄, 모든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죽으셨습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어떻게 하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드리고 복종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겸손은 복종하는, 복종하는 것입니다. 겸손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겸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 우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죽으실 때 말씀했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요 19:30). 그 말이 뭡니까? “나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언해 놓으신 말씀, 하나님 아버지가 명령하신 말씀, 다
이루어드렸다”, 그 말인 것입니다.
내 뜻을 전혀 꺾지 않으면서 상대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것은 위선입니다. 상대의 의견을
복종하려면, 내 뜻을 꺾어야 합니다. 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복종해야 해요.내 고집과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겸손이에요.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복종하는 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사울처럼 순종하다가 불순종함으로
실패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으로 살다가 육으로 마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육으로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의 사람이 되었다면, 끝까지 영으로 살다가 영으로 마쳐야 할 것입니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둘째, 평화가 임한다
두 번째입니다. 겸손하면 “평화가 임한다.” 따라합시다. “겸손하면 평화가
임한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 이 지구상에서, 이 한반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뭡니까? 전쟁 없는 평화입니다. 우리 순복음인천교회
2003년도 공동기도제목 여섯 가지 중에 첫 번째가 뭡니까? “전쟁 없는 평화”입니다. 어떻게 하면 전쟁이 없을까? 어떻게 하면 평화가 올까?
오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쟁 없는 평화가 오게 해주옵소서. 우리는 전쟁을 싫어합니다. 6・25와 같은 전쟁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평화가 오기를 원합니다. 평화를 사랑합니다.”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우리가 할 일은 뭡니까? 교만하지
말고, 겸손한 것입니다.
겸손하면 평화가 옵니다. 다툼과 분쟁은 어디서 오느냐? 교만에서 옵니다. 가정에서 작은 일이 큰
싸움 되는 것은 내 생각만 강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 생각하지 아니하고, 남편 생각만 강요합니다. 싸움이 일어납니다. 또 아내는
남편 생각하지 아니하고 아내 생각만 합니다. 다툼이 일어납니다. 부모는 자녀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른 생각만 합니다. 갈등이 일어납니다. 또 젊은
자녀들은 부모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른들 생각하지 아니하고, 제 생각만 합니다. 분란이 옵니다.
겸손히 나보다 상대를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더 좋게 보고, 아내는 남편을 더 좋게 보고, 며느리는 경험 많으신 시어머니를 더
좋게 보고, 또 시어머니는 지식 있고 학벌 있는 며느리를 좋게 보고, 서로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나보다 좋게 여기면, 분명히 다툼이
없습니다. 평화가 있습니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입니다. 바울이 한 말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사람이 되신 예수님처럼 상대
입장에 서면, 분명히 평화가 옵니다. 평화가 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자기를 포기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셨습니다. 그 때 천사들이 뭐라고 노래합니까? “땅에 평화가 왔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마구간에 태어나셨습니다. 말구유에 누워 계십니다. 그 때 천사가 노래하는
겁니다. “이 땅에 평화가 왔다”, “이 땅에 평화가 왔다.” 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지셨다. 겸손하게 낮아지셨다.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 이 땅에 평화가 왔다. 평화가 왔다.” 누가복음 2장 14절 하반절입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겸손하면 평화가 옵니다. 힘있는 사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하면 평화가 옵니다. 힘쓸 수 있는 사람
힘 안 쓰고, 힘쓸 것을 포기하고 겸손하면 평화가 옵니다. 우리 모두 겸손해져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배운 자와 못 배운
자가 서로서로 귀하게 여기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서로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가 서로서로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하는 거예요.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인정하고 협력할 때, 분명히 평화가 자기 가슴에 먼저
임합니다. 그 평화가 그 가정에 먼저 오고, 그 평화가 그 일터에 먼저 오고, 그 평화가 그 사회에 먼저 오고, 그 평화가 나라와 민족과 세계,
인류에 오게 될 것입니다.
셋째, 쉼을 얻는다
세 번째, 겸손하면 “쉼을 얻는다.” “겸손하면 쉼을 얻는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 피곤합니다”, “아, 힘이 듭니다”, “아, 쉬고 싶습니다”, “쉴 수 있는 자리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합니다. 그럴까요? 겸손하면, 그 즉시 쉼이 옵니다. 지금 그 피곤하고 지친 그 자리가, 그 현장에서 자기가 겸손하면, 낮아지면 쉼이
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울 때,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기도하는 것 중요합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성령충만해야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뭐냐?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가 뭐냐? 온유와 겸손인 것입니다.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하면,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했어도 기도 많이 한 것 때문에 교만하다면 쉼이 없습니다. 성령받은 것 때문에 교만하다면, 쉼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것 때문에 교만하다면, 쉼이 없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예수님의 쉼은 “휴식”이 아니라, “안식”입니다. “휴식”은 일에 지쳐서 그냥 쉬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어제 이런 말을 했습니까? “오늘 늦잠 좀 자자.” 그건 휴식입니다. “일 많이 했으니까, 목욕탕 가서 목욕 좀 하고 잠 좀
푹 자자.” 그건 쉼입니다. “일 많이 했으니까, 텔레비전 연속극 좀 보자”, “인어 아가씨” 좀 보자.“ 다 쉼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안식은
그게 아니라 우리에게 새 힘, 새 마음, 새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 우리가 쉼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 힘을 얻으면, 새 능력
받으면, 새 마음을 가지면, 원수 마귀가 우리를 지치고, 불평하게 하고, 원망하게 하고, 고통을 주려고 왔던 원수 마귀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떠나게 될 수 있습니다. 아침 햇빛이 임하면 그 밤이 가는 것처럼, 빛이 임하면 어둠이 가는 것처럼, 주의 능력이 임하면, 주의 힘이
임하면, 피곤도 가고, 가난도 가고, 질병도 가고, 원수 마귀도 가고, 원수 귀신도 가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능력
안에서, 성령 안에서, 말씀 안에서 여러분, 힘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을 배울 때, 말씀을 전할 때, 여러분,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영혼에 힘이 솟습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하는
용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성령의 능력이, 성령의 새로움이, 성령의 충만함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새벽에
힘들지만 새벽에 깨어서 하나님 성전에 나와서 기도할 때, 마음에 평안을 얻습니다. 이것이 뭐냐? 예수님이 주시는 쉼인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성령에 나오는 삭개오처럼 물질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 어떻게 보면 부정으로 벌었습니다. 그것을 회개하고, 그것을 자복하고, “내가
잘못 벌었습니다. 이것을 내놓겠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나 때문에 손해본 사람을 위해서, 내가 내놓겠습니다.” 그리고 내놓고 쓸 때,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쉼인 것입니다. 싸놓고 고민하지 말고, 내놓고, 나눠주고, 베풀어주면서 쉼을 얻는 것입니다.
진실로 은혜의 은혜를 더더욱 입기를 원한다면, 받은 은혜보다 더 받기 원한다면, 은혜의 은혜를 더 받기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우리가 겸손하면, 겸손하면, 더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지금까지 받은 은혜보다, 받은 사랑보다, 받은
복보다, 더 많이 받기를 원하시면 “아멘”하겠습니다. 더 많이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길이 뭘까? 그 길이 뭘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 4장 6절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교만하면 있는 것도 뺐고, 겸손하면 더 주신다는 거예요. 더 주신다는 거예요. 더 받기 원합니까?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아가면, 육체에 힘이 솟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육체도 쉴 수 있습니다. 마음도 쉴 수 있습니다. 영혼도 쉴 수 있습니다. 새 힘을 얻고 우리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겸손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겸손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힘을 얻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힘있게, 멋지게, 신나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치료를 받는다
네 번째,
하나 더 합니다. 겸손하면 “치료를 받는다.” “겸손하면 치료를 받는다.”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현대인은 자기주장, 자기우선, 자기만족,
자기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감히 내가 누군데”, “감히 내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그렇습니다. 자기중심적인 현대인의 삶은 “왕따”와 “현대병”을 부른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로 고생을
합니다. 현대인이 현대병에서 벗어나는 길은 뭘까? 겸손해지면, 겸손해지면, 현대병에서 벗어납니다. 겸손해지면, 왕따 당하지 않습니다. 교만하면
어떤 병도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병원에 가서 속히 치료받으려면, 간단합니다. 의사 앞에 아는 척하지 말고, 의사가 지시하는 대로,
그대로 순종하고, 겸손하게 따르면 치료받아요. 근데 별거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고 교만하다가는 그 병을 오히려 악화시켜서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이 성경에도 보면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나아만 장군이,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걸렸잖아요. 어린 소녀가 이제 이웃
나라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면 나을 수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처음에는 나아만이 교만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감히 내가
누군데”라고 교만했을 때, 나아만은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열왕기하 5장 11절로 12절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이렇게 치료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부하들이 말합니다. “그렇게 하지 마옵소서.”
나아만 장군이 겸손히
말씀에 순종할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문둥병이 치료받았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열왕기하 5장 13절로 14절에 보면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선지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 보고 “위대한
일, 공적이 크게 될 일을 하라”, 그러면 안 했겠냐 이거예요. 그런데 작은 일이라고 해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몸을 적시라고 그래서, 그것이
시시하다 그래서, 그 말을 안 듣습니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나아만이 교만이
꺾인 것입니다. 겸손해진 것입니다. 이제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누구입니까? “엘리사
선지자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치료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니까?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에 순종하니까. 요단강 물이 약물이라 치료받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선지자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순종하니까, 말씀에 순종하니까, 나아만 장군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하니까,
교만한 나아만 장군을 겸손하게 만드신 그 하나님의 선물로 깨끗하게 치료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진
백부장 알잖아요? 마태복음 8장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 나라는 마치 일본 나라가 우리 나라를 점령하고 있었던 것처럼, 로마
나라가 유대 나라를 점령했습니다. 로마 나라의 백부장이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앞에 와서 말합니다. “내 하인이 병들었습니다. 치료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가자. 네 집으로 가자. 내가 치료해주마.” 백부장이 뭐라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보세요. 마태복음
8장 8절에 보니까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이 백부장이 아주 겸손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아주 겸손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자기 하인의 병도 치료해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겸손하면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남도 살릴 수 있습니다. 내가 겸손하면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복 받게 할 수
있습니다. 백부장이 겸손하니까 그 하인의 병이 치료받았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교만할 때 치료받지 못했으나, 겸손할 때 문둥병이 치료받았습니다.
우리가 겸손하면, 우리가 겸손하면, 복 받습니다. 물질의 복도 받고, 승리의 복도, 인생 성공의 복도 받고, 건강의 복도
받고, 영생의 복도 받습니다. 잠언서 22장 4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재물을 주신대요.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영광이 있대요.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영원히 사는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지만(잠 16:18), 겸손은 승리의 인도자라 그랬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따라가야 합니까?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셔서 우리도 세례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령 받으셔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셔서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셔서 우리도 전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겸손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여주신 것처럼,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분명히 이 땅에 평화가, 각자 마음에
평화가, 가정에 평화가, 교회에 평화가, 인류에 평화가 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서 성령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겸손한 성도가 됩시다. 겸손한 목회자가 됩시다. 겸손한 제직이 됩시다.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전쟁을 멈추고 평화가 오게 해주실
것입니다.